상부 '단강'·중앙 '여강'·하단 '기류'로 삼등분
영욕과 애증으로 점철된 삶 강물로 씻고 싶어
여주 역사를 떠올리며 옳고 그름을 평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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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희 여주시장
남한강을 떠올려봅니다. 원주와 충주의 경계인 늠름한 자산(紫山)에서 출발합니다. 신선이 사는 곳은 좋은 약을 제조하기 때문에 불그스름한 구름과 같은 연기가 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선이 사는 곳을 자운동천(紫雲洞天)이라고 불렀듯이 자산은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남한강을 삼등분하여 상부를 단강(丹江), 중앙을 여강(驪江), 하단부를 기류(沂流)라고 했습니다. 자산은 단강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조금 더 내려오면 청미천과 만납니다. 물이 맑고 깨끗해 이름도 청미천이라고 붙였습니다.

우측이 강천섬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조성되었지만, 남이섬보다 넓고 아름답습니다. 은행나무가 더 자란다면 명소가 될 것입니다. 강 건너가 여강길의 하나인 아홉사리길입니다. 옛 풍경을 간직한 작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낙엽이 떨어진 길은 더욱 호젓할 것입니다.

조금 더 내려오면 우만리 느티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예전 강천과 점동을 오가던 배들이 이정표로 삼았던 나무입니다. 뱃사공은 이 나무를 보면서 거리와 방향과 힘을 조절했을 것입니다. 기준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 또한 누군가의 좌표가 될 수도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집니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부라우 나루터에 닿습니다. 나루터 이름은 붉은 바위 때문에 생겼다고 합니다. 이름도 예쁘지만 풍경 또한 나루터 중에서 가장 으뜸입니다. 바위 맨 윗부분에 단암(丹岩)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단암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들인 민진원의 호입니다. 명성황후 생가와 연결하는 하나의 점(點)입니다.

더 내려오면 신륵사 다층전탑과 강월헌(江月軒)이 보입니다. 다층전탑은 우만리 느티나무와 같은 역할을 했으며, 강월헌은 나옹스님의 다비(茶毘)장소입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무학대사가 지은 선시를 떠올려봅니다. 영욕과 애증으로 점철된 삶, 강물로 씻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강월헌에서 대각선으로 여주를 바라보면 보이는 곳이 마암(馬巖)입니다. 강물은 흘러 강월헌 앞 바위에 부딪히고 마암으로 달려갑니다. 황마는 홍수를, 여마는 평상시 강물을 뜻합니다. 황마와 여마가 다투는 것을 신기한 굴레로 제압한 것인 신륵(神勒)입니다. 마암이 강한 물결을 막아 여주의 땅은 패여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름과 전설, 자연현상, 이치와 맞닿아 녹아있는 곳입니다.

마암에서 여주대교를 건너 아래쪽은 제법 높은 제방이 있고 강물이 흐릅니다. 그곳이 여강팔경의 하나인 팔대수(八大藪)가 있었던 곳입니다. 수(藪)는 늪이나 덤불로 굵은 소나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늪에는 목은 이색의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정몽주의 죽음과 연루되어 여주와 장흥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면서 여주로 오다가 사망합니다.

여주시사에 따르면 태조의 벼슬을 거부한 목은은 여강에 이르러 어주(御酒)를 받아 마시고 죽었다고 합니다. 주변의 만류는 뿌리치고 조리대로 막은 술병마개를 따며 '내가 사욕으로 살았다면 이 마개는 떠내려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멀지 않은 곳에 뿌리내릴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조리대는 제비 여울에 자리 잡아 큰 숲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사생관(死生觀)은 역사를 바꿉니다.

강물은 지류를 흡수하여 본류가 되고 바다에 이릅니다. 역사 또한 시간, 기록, 구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남한강으로 바라보며 여주의 역사를 떠 올려 보았습니다.

/원경희 여주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