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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향(1966~)

전당포 외벽 철제계단 위로 미끄러지며
커피 배달을 가는 여자 가죽스커트 터진 치맛단 속을 돌아
백반집 앞 양파 다듬는 노부부 검버섯을 지우며
종합병원을 막 빠져나온 영혼에도 잠시 머물다가
저녁내 부엌 쪽창에서 어른거리다

김선향(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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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이 모든 사물에 처음과 마지막이 있는데, 계절의 끝에서 내리는 눈은 끝과 시작을 동시에 가졌다. 마지막을 상정하는 '사라지고' '떨어지고' '멀어지고' 등에서 우리는 끝 안에 있었던 처음과, 처음 안에 이미 와 있던 끝을 볼 수 있다. 첫눈은 끝에 내리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처음과 마지막을 함의한 중의적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희고, 검게 여문 그 씨앗의 이름을 '첫눈'이라고 한다면, 철제 계단을 올라가다 미끄러진 노동자 K에게, 커피 배달하다가 스커트 터진 가출한 양양에게, 자식들 모두 출가시키고 검버섯만 남은 노부부에게, 이제 막 생애를 빠져나온 영혼에게 눈은 검은 상처를 지우면서 하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하얀 눈이 내리는 사이, 촛불은 타올라 '하얀'의 'ㄴ'을 지우며 '하야'로 녹아내리고 싶은 밤도 태웠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