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 대리공사로 국권상실 막아서
유해 국내송환 용인 덕성리에 묘소
11월 한 달 동안 초·중·고교 게시판에는 '11월의 독립운동가' 포스터가 게시돼 있습니다. 그 포스터의 주인공은 국가보훈처에서 2016년 11월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이한응입니다.
이한응은 1905년 32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영국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05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입니다.
이한응은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을사늑약과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죽음으로 조국의 상황을 국내에 알린 인물입니다.
이한응은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이한응은 한학을 배우다가 16살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근대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육영공원은 1886년 개교한 학교로 다른 과목도 가르쳤지만, 미국이나 영국인 교사들이 중심이 돼 영어 과목을 주로 가르쳤습니다.
이한응이 이 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외국어를 배워 민족을 위한 외교활동을 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1894년 과거시험인 성균관 진사에 합격한 후 한성부와 관립영어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외교관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01년 주영공사관 참사관으로 영국에 파견되었던 이한응은 1904년 초부터 대리공사로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대리공사란 특명전권공사가 비어 있을 때 또는 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때 일시적으로 대리하는 공사를 말합니다.
세계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있던 이한응은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전부터 영국정부를 상대로 조국의 영토보전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전부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한응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막아보고자 더욱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정부의 비협조는 물론 일본의 압박과 방해가 심해지면서 이한응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이한응은 살해의 위협까지 느껴 영국 정부에 신변보호 요청을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있었다고 합니다.
외교관으로서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한계를 절감한 이한응은 비통한 심정으로 1905년 5월 이역만리 영국에서 자결을 택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을사늑약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자 했지만 결국 그해 11월 17일 일본에 외교권을 상실하는 조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됐습니다.
애국열사 이한응 대리공사의 유해는 고종의 특별 지시와 런던주재 한국명예총영사인 모건에 의해 국내로 돌아와 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368-16에 모셔져 있습니다. 절망적인 국제정세 속에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외교적인 노력을 전개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이한응 열사의 애국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장문 대지중 수석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