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이래 북성동 12개국 66명 안치 1965년 주변 시가화로 이전
현재까지 해당국가 인사 참배 꾸준 "이국적 정취 그대로 옮겨야"
1883년 인천 제물포항 개항과 함께 다양한 나라의 수많은 외국인이 인천으로 들어왔다. 이들로 인해 인천 개항장에는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서양 종교나 의술, 각종 서양식 상품 등이 활발하게 전파됐다.
서양 사람과 일본인·중국인 등이 인천에 정착한 뒤로는 이들을 위한 묘지도 필요해 졌다. 주로 서양인들이 묻힌 북성동 외국인 묘지의 최초 매장은 1883년 7월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인천의 개항기와 근대화 시기를 경험한 영국·미국·러시아·독일 등 12개국을 포함한 외국인 66명(국적 미상은 26명)이 외국인 묘지에 안치됐다. 중구 북성동 외국인 묘지는 주변이 시가지로 바뀌면서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했다.
인천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성누가병원'을 1891년 설립한 미국 출신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1865~1898) 박사도 이곳에 누워 있었다. 1890년 의료선교를 위해 인천으로 온 그는 자택에 진찰실과 약국을 차렸다가, 환자 수가 점차 늘자 시설을 확대해 현재의 중구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자리에 성누가병원을 설립했다.
성누가병원이란 명칭은 서양인 선교사들 사이에서만 불렸고, 병원에는 조선인을 위해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선행으로 즐거운 병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랜디스 박사는 조선인의 정서를 잘 이해했고,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의 유일한 중국인인 우리탕(吳禮堂·1843~1912)은 청나라 외교관 출신으로 인천해관에서 일했다. 우리탕은 송학동에 '오례당'이라는 독일식 별장을 지었는데, 당시 인천 개항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혔다고 한다.
스페인 출신인 우리탕의 아내는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인천에 살다가 남편 곁에 묻혔다. 우리탕과 아내의 묘는 철제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다.
개항기 인천에서 해외무역을 주도했던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간부 헤르만 헹켈(Helmann henkel), 타운센드 상회를 운영했던 미국인 월터 타운센드(Walter Davis Townsend) 등도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 주인공 딸인 베넷 하나 글로버(Bennett Hana Glover)의 묘가 여기 있다는 점은 외국인 묘지 이야기를 인천 너머로 확장한다.
이밖에 수많은 외국인 묘지가 다양한 매장문화를 통해 각국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상당수 묘지는 현재까지도 관련 국가 대사관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참배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게 인천시 설명이다.
인천시는 청학동 외국인 묘지를 내년 1월까지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전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각 묘지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 청학동 외국인 묘지가 품어온 이국적인 정취와 문화재적 가치를 살려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든 개항기 사람들 누가 있나
인천 최초 병원설립자·淸 외교관… 각국 매장문화 고스란히
입력 2016-12-01 23:06
수정 2016-12-01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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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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