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령
2007년 6월 9일 자택에서 경인일보와 인터뷰하면서 '백범일지' 초판본 등을 보여주면서 옛일을 회상하던 모습. /경인일보DB

인천지역 민족진영 인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1948년 남북회담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던 하상령(河相領) 선생이 지난 2일 타계했다. 향년 100세. 하상령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했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조소앙(1887~1958), 이 두 인물과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

1917년 인천 동구 화평동에서 태어난 하상령 선생은 창영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 20회 졸업생이다. 수도국산 근처에서 정미소를 하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그 어린 나이에 생계를 챙겨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서점이었다. 지금의 동인천역 부근인 인현동 1번지에 위문당(爲文堂)이란 서점을 냈다.

80년이 지나도록 당시 서점 명함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그 명함에 적힌 이름은 하연숙(河璉淑)이었다. 여자 이름으로 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남자가 귀하던 집안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상령(相領)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인천에는 유독 서점이 많지 않았다. 그런 점을 간파하고 서점을 낼 만큼 영민했던 하상령 선생은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몇 년 뒤 수석 사무원에까지 오른 그는 인천에서 평양에까지 다니면서 법원 관련 업무를 처리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0년대 중반 갑자기 그 일본인 변호사가 본국으로 떠나면서 직장을 잃었고, 다시 인천에서 서점을 냈다.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면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 징용을 시작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하 선생은 일본 유학을 택했다.

공부하던 중 1943년 귀국해 동구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에 들어갔다. 이 또한 일본 본토까지 뻗쳐 온 징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여기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다시 서점을 내 세를 키웠지만 옆 과일가게에 불이 나는 바람에 서점을 통째로 날려야 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주변에서 권한 것이 사회운동이었다. 30세에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인천지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대한건국 인천청년회도 조직했다. 이 단체 이름은 직접 지었다. 당시 좌익이 우세하였지만 그는 우익 쪽이었다.

대한노총이 인천에 생길 때는 고문을 맡았다. 한국독립당 중앙당 집행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백범 김구가 소장으로 있던 건국실천원 양성소를 1기로 졸업하기도 했다. '백범일지' 초판본이 나왔을 때 백범이 직접 겉표지에 친필 사인을 하면서 전해줄 정도로 친밀했다.

나중에 하상령 선생은 조소앙에 빠졌다. 삼균주의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조소앙과 함께 사회당 활동도 했다. 하상령 선생은 1948년 남북회담 때 삼균주의 청년동맹원 자격으로 방북단에 포함돼 평양을 방문했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여파로 1961년 5월 18일, 5·16군사쿠데타 이틀 뒤 경찰서에 붙잡혀 가 29일이나 영문도 모른 채 유치장 밥을 먹어야 했다. 홍익경제연구소 하석용 소장이 그의 아들이다. 빈소는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6일 오전 8시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