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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미국 '뉴스위크'지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표지에 싣고 'The Hermit King(은둔의 제왕)'이라고 했지만 미국 재벌의 대명사는 모건(Morgan)이다. 일본의 미쓰비시(三菱)와 미쓰이(三井), 중국의 저장그룹(浙江集團), 인도의 타타(Tata)그룹도 꼽힌다. 재벌하면 둥근 콘크리트 덩어리부터 연상된다. 영어 conglomerate(재벌기업)가 광물학에서는 자갈 따위로 둥글게 뭉쳐진 덩어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재벌'보다 '대기업'으로 부르지만 '총수' 호칭만은 그대로다. '총수(總帥)'란 군대의 총사령관이나 원수(元帥)를 뜻한다. 帥가 '장수 수'자다. 미국의 매카서(맥아더)와 아이젠하워, 영국의 몽고메리,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쉬샹치엔(徐向前)과 펑더화이(彭德懷) 등이 모두 별 5개짜리 원수였고 총수였다. 굳이 민간인을 '총수'로 부른다면 늘 군복차림이었던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쿠바의 카스트로 정도다.

중국에선 총수도 아닌 '통수(統帥)'다. 3군사령관도 '三軍統帥'다. 일본에서도 총수는 '총대장'이란 뜻으로 쓰인다. '지체가 높다'고 할 때의 '지체 벌(閥)'자 '재벌'보다는 '대기업'이 낫고 '총수'보다는 '회장'이 무난한 호칭이다. 오늘 최순실사태 국정조사를 위한 국회 청문회에 9명의 대기업 총수들이 증인으로 출석한다며 '총수'라는 말이 또다시 빗발쳤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나 긴장하고 불쾌하랴. 청문회 '청문'은 '들을 청(聽), 들을 문(聞)'자다. 듣는 게 청문회다. 그러나 정반대다. 장황한 질문 끝에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며 핀잔과 호통부터 치는 변태가 연출된다. 정권마다 떼돈은 뜯길 대로 뜯기고 정경유착 비난에다 세무조사 공포까지…. 경제발전 기여, 복지 장학사업, 의연금, 불우이웃돕기 등 할만큼 하건만 어제 전경련 앞에선 '해체하라! 총수들 구속하라!' 등 시위까지 벌어졌다.

오늘 청문회의 대기업 회장들은 측근 참모들과 가족의 신신당부깨나 받았을 게다. 모욕감이 굴뚝처럼 치밀고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더라도 '꾹꾹 참으셔야 한다'고. 경기침체에다 김영란법 따위 등 서민들 고통이야 더욱 자심하지만 그래도 국회청문회에 끌려가지 않는 그거 한 가지만은 다행이 아닌가 싶다.

/오동환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