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801000551300025652

기억에서 너무 멀게 느껴지는 봄
폭염으로 고통스러웠던 여름
경주 지진으로 두려웠던 가을
부도덕한 정권 규탄하는 겨울
촛불로 현실 외치는 사람들 볼때
난 광장이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

2016120801000551300025651
김금희 소설가
우리가 한 해 동안 만나거나 스쳐 지나간 적이 있을까. 2016년을 찬찬히 떠올려보면 유독 봄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것이 별일이 없었기 때문인지 혹은 너무 바빴기 때문인지, 원래 봄이 그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봄은 한 계절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편에서는 또 저 멀리에 있는 끝의 시간이라서 일 년을 살고 나면 그 시간이 너무 아득해지는지도. 그래서 또다시 겨울이 되면 봄을 기다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막상 봄을 겪고 나면 다시 봄을 잊을 것이면서 말이다.

여름은 너무 길고 고통스러웠다. 폭염이 이어지면서 거리를 나서면 어떤 자비도 없는 고온의 햇볕이 쏟아지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일이 늘어서 노상 카페에 앉아 글을 써야 했는데 매장은 에어컨 때문에 추울 지경인데 유리창을 뚫고 들어서는 햇살만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롭게 뜨거웠던 기억이 난다. 기력을 잃었고 사망자도 발생한 기상 관측 이래의 최대 폭염 속에서 '누진세'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요구들이 빗발치자 정부는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지만 아직 개편안을 발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여름에 우리는 더위 앞에 무기력한 채 지하철에서 스쳐지나가거나 밤의 공원에서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 채 앉아 더위를 잊어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유명한 냉면 가게에서 그 찬 것을 먹으며 겨우 속을 달래거나, 때아닌 감기 같은 것에 걸려 병원에서 함께했을지도. 아주 피로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더위였다.

그렇게 시작된 가을에는 또 지진이 있었다. 경주에서 발생한 5.8의 지진은 우리가 겪을지도 모르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지진이 있던 날에도 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나도 전화기를 들었다. 흔들렸었어? 하고 묻고 다행이야,라고 맺는 통화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진은 우리에게 일본이 겪어야 했던 재앙에 대해 환기시켰다. 경주에는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이 건설되어 있지 않은가. 반핵의 목소리가 커지고 지진에 대한 대비책이 논의되었지만 그 가을의 관심이 지금은 좀 사그라든 것이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리는 너무 바빴고 일상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 겨울은 어떤가. 한국사회의 기득권층의 유착이 어떻게 무소불위로 진행되었는지를 매일 확인하게 되는 오늘은. 지금 광장에는 부도덕한 정권을 규탄하는 소리, 국정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소리,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소리, 군 위안부와 관련해 일본과의 합의를 반대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광장에 선 어느 날에 자유발언을 위해 나온 어떤 이는 대통령이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 만나야 할 이유보다 만나지 못할 이유가 더 많은 일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기억에서 너무 멀게 느껴지는 봄과 거리를 걷는 것마저 힘들던 여름에, 채 가지 않은 더위와 지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간신히 일상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광장에서 만나고 있는 것을 보면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광장은 집회가 이루어지는 현실의 '그곳'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전철에서 뉴스를 클릭해보는 사람들 곁에 설 때, 정말 해도 너무 한 것 아니냐는 말을 나누며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가방에 노란 리본을 메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볼 때 나는 광장이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년에는 더 가까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겨울이 허투루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봄은 예비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한번은 만나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 맞을 2017년의 봄이길, 바라고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김금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