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김영란법·AI등 잇단 악재에 소비자 지갑 닫혀
긴불황에도 명맥 이어오던 대표 전통시장마저 휘청
하루 종일 손님 끊긴 상점들, 임차료조차 못낼 처지
상인 자구책으론 한계… "정부차원 경제 대책 시급"
송년회·회식 줄고 업무 관련자끼리는 '1차'서 마무리
식사비 3만원 넘기 쉬운 일식집·한우전문점 등 기피
택시는 손님없어 공회전… 화훼업계는 매출 반토막
유통업계, 가성비 높은 제품 승부수 '공격적 마케팅'
요즘 직장인들이 모이면 심심치 않게 하는 말이다.
일명 김영란법(청탁금지법)에 이어 '최순실 게이트' 후폭풍까지 몰아닥치며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매년 연말이면 한해를 돌아보며 새해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올라 밝았던 연말 분위기는 이제 옛말이 됐다.
연말 특수를 기대했던 소상공인을 비롯해 유통 대기업들까지 침체된 분위기로 인해서 우울하다.
지난 9월 김영란법이 시행되며 일부에선 소위 '접대'가 법에 위배되지 않도록 중저가 메뉴들을 선보이며 체질 개선에 나서기도 했지만 손님이 급감해 문을 닫는 음식점들이 속출하고 있다.
연말이면 직장인으로 넘쳤던 유흥가에서도 송년회를 즐기는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려워졌고, 선물을 주고 받는 모습도 보기 힘들다.
이렇다 보니 서민 경제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 택시업계와 전통시장들도 손님이 없어 어려움을 호소한다.
택시업계와 전통시장 상인들은 일반 시민들이 지갑을 좀처럼 열리 않는다며 좋았던 연말 분위기는 더 이상 만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년과 다른 2016년 연말 분위기를 도내 곳곳을 다니며 살펴봤다.
# 사람의 향기를 잃어 버린 전통시장
수도권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63년 전통의 평택 통복시장도 침체된 경기 여파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었다.
22일 오후 7시, 예년 같으면 연말 특수로 시중가보다 저렴한 물품 등을 사기 위해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할 통복시장의 거리는 한산했다.
통복시장은 수도권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답게 8만7천200㎡ 규모의 부지에 630여개 점포에서 1천200여명의 상인이 입점해 있다.
또한 통복시장은 판매하는 물품에 따라 바둑판처럼 거리가 잘 정비돼 손님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에 좋은 동선을 갖추고 있어 대형마트 등이 생기기 전 성황을 이뤘던 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꾸준했다.
하지만 올해는 탄핵정국과 김영란법 시행,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의 확산 우려 등 각종 악재와 맞물려 산업 경기 또한 침체기에 들어가 소비심리가 위축됨에 따라 통복시장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통복시장의 골목골목엔 물건을 사러 온 손님들보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더 많은 모습이었다. 일부 상인들은 몇 안되는 손님들을 놓칠세라 자신의 물건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으나 대다수 상인들은 그저 맥없이 지나는 손님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님들 또한 가벼워진 호주머니 탓인지 자신이 구매하러 온 물품 이외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고 한 푼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상인과 지루한 흥정을 하며 쉽게 지갑을 열지 않았다.
얼마 전 추석 때만 하더라도 주부들과 직장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시장에 들러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상인들과 가격을 흥정하는 등 생기넘쳤던 분위기와는 딴판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AI 창궐의 여파로 생닭을 파는 상점들은 문조차 열지 않았고, 폐점하기에 이른 시간임에도 오후 8시부터 일부 상인들이 문을 닫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님이 적은 탓에 전통시장 특유의 시끄러움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간혹 상인들간의 인정과 재치가 넘치는 수다가 잠시 들리는 듯 했지만 이내 조용해지고 숙연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같은 날 방문한 경기북부지역 최대 전통시장인 의정부제일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상인들은 지난 11월 김장철에 이어 1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날이었던 지난 21일만 반짝 특수를 누렸을 뿐 다른 날들은 손님이 너무 없어 폐업하게 생겼다며 하소연했다.
경기북부지역에서 만큼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의정부제일시장은 지난 2008년부터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수백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현대화사업이 진행되면서 그동안 3천명이 넘는 타지역 상인들이 벤치마킹을 올 만큼 경기의 흐름을 타지 않은 전통시장 중 하나로 손 꼽혔다.
실제 이곳은 다른 지역의 시장과 달리 점포와 상인들의 숫자에 큰 변동은 없지만 최근 심상치 않은 나라 분위기로 매출 부진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과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제품을 취급하면서 시작된 수입잡화를 취급하는 매장들은 요즘은 하루에 단 한 푼의 매출도 올리지 못하는 곳도 생기고 있다.
수입잡화매장을 운영하는 이모(73)씨는 "대다수 사람들은 '하루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데 왜 장사를 하겠냐'며 불경기에 따른 매출 부진을 믿지 않지만 정말 하루에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는 날이 이틀 걸러 하루는 될 것"이라며 "가게라도 나와야지 덜 늙을 것 같은 기분에 울며 겨자먹기로 가게 문을 연다"고 말했다.
이처럼 손님이 끊어지자 시장 안쪽의 매장들은 한 달에 40만 원 남짓한 임대료 내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반면 시장 입구 쪽에서 청과물을 파는 매장들은 항상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이곳 역시 속 빈 강정이나 다름 없었다.
월 임대료가 안쪽 매장 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보니 최근에는 한 개 매장을 여러 명이 나눠 운영하는 기형적인 형태의 점포들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과물 매장처럼 신선식품을 취급하는 곳을 제외한 의류나 잡화 매장들은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눈에 보이게 줄었다는 것이다.
의류 수선매장을 운영하는 최모(59·여)씨는 "옷 가게에서 옷을 못 팔면 우리 같은 수선집도 그만큼 손님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얼마 전 만 해도 옆 의류매장에서 옷을 구입한 고객의 수선의뢰가 많았지만 지금은 간혹 있는 손님들도 집에서 옷이나 이불을 가져오는 손님이 전부"라고 말했다.
이상백 의정부제일시장 상가번영회장은 "그나마 우리 시장은 수년 간에 걸친 환경개선사업 덕에 단골 손님들이 많아 불황 속에서도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라 전체 분위기에 의한 경기불황을 극복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고인 윗물이 흘러내려야 아래쪽에도 물이 공급될 수 있는 만큼 정부 차원의 경기회복 정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자영업자에게는 너무나 추운 연말
연말하면 떠올리는 것이 송년회와 회식과 같은 술자리다.
일반음식점들은 장기 침체에 빠져 있고 연말이면 가장 호황을 누린다는 유흥업소들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져 한산한 모습이다.
김영란 법에 더해 연말 공직기강 확립 등 송년모임을 즐기기에 눈치를 봐야할 상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 술자리의 경우 기준 금액인 3만원을 넘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연말 모임 약속 장소로 일식집이나 한우전문점 등 고급 음식점은 기피 대상이다.
22일 고양 화정동에서 한우식당을 운영하는 최모(57)씨는 "기본적으로 경기가 안 좋은 데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며 매출이 상당히 꺾였고, 최순실 사태가 겹치는 바람에 소비심리가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최근 매출 부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소고기를 아무리 싸게 내놓아도 팔리질 않는다"고 토로했다.
고양시 최대 유흥가 라페스타 인근에서 노래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김모(51)씨는 "그 많던 단골고객이 요즘 통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소규모 젊은층 고객이 다소 늘었다는 김씨는 "이전 같으면 1차 회식 후 2차 유흥업소가 공식이었는데 손님들 얘길 들어보니 회식 자체가 많이 줄었고, 업무 관련자들끼리 2차는 아예 안 간다더라"며 "김영란법의 영향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수원 인계동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박모(54)씨도 "손님이 줄다보니 유동인구가 많은 길거리를 나가봐도 손님 보다는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며 "매일 비어 있는 테이블을 보며 이번달에는 직원들 월급과 월세를 어떻게 낼지 한숨만 나온다"고 말했다.
음식점과 술집에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자 운수업계에도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다.
개인택시 기사 최모(61)씨는 "대부분 연말 모임이 1차에서 끝나는 분위기다 보니 밤 11시 이후에는 손님이 없다"며 "개인택시하는 기사들도 힘든데 회사택시를 모는 기사들은 힘든 것을 넘어 속된 말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요식업 경기와 별도로 고양지역은 화훼산업까지 타격을 받고 있다. 원당화훼단지 도매업체들은 판매량이 반토막 났다.
동양란을 주력으로 하는 E사 유모(54) 대표는 "김영란법 내용이나 금액 기준은 이미 의미가 없다. 소위 엮이기 싫다는 생각에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1년간 기른 난을 경매에 내놓아 유찰되거나 제값을 못 받으면 농가는 당장 재배면적부터 줄일 것이고, 업계는 연쇄적으로 경영난에 빠진다. 인력 감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 침체된 분위기 반전에 나서는 유통업계
유통업계는 경기 침체와 뒤숭숭한 연말 분위기를 뒤집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도내 한 백화점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직전까지가 한 해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대목이나 다름 없는데, 올해는 예년같지 않다"며 "청탁금지법의 영향에다 불안 정국이 이어지면서 주말집회에 참여하는 국민들도 많고 전반적으로 소비심리가 위축돼있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올해 유통업계는 가성비 높은 제품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22일 한국체인스토어협회에 따르면 올해 유통업계 10대 뉴스 조사 결과, 성능 대비 가격이 저렴한 제품을 찾는 가성비 트렌드의 확산이 눈에 띈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는 가계부채가 3분기 기준 1천300조원에 육박하는 등 경기 불확실성 요인이 많아지면서 소비 침체가 심화, 사회 전반적으로 소비가 위축되는 분위기가 퍼졌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PB상품을 강화하거나 소포장, 소용량 제품 등 합리적인 가격의 상품 개발에 집중했다.
한국체인스토어협회 관계자는 "올해는 경기침체와 유통시장의 포화가 맞물리면서 유통업체들이 PB 개발로 성장 동력을 찾고 옴니채널 전략을 강화한 한해였다"며 "이런 흐름은 2017년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유통업계는 이 같은 분위기가 연말을 넘어 설명절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다.
청탁금지법으로 명절 특수를 이끌던 선물세트 시장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5만원 미만의 명절 선물세트를 늘리며 대응하고 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5만원 미만의 선물세트가 전체 판매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연말의 침체된 분위기가 명절 대목까지 이어지면 매출 감소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벌써부터 명절 마케팅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역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