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사랑하는 모임 많지만
무조건이 지나쳐 잘못을 반성하고
청산하도록 돕는게 아니라
거짓 모의·합리화 하려는데 앞장
피하고 부정할것이 아니라
제대로 책임지게하는게 진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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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시(詩)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뛰어난 극적 형상화이다. 주인공 미자의 극중 배역은 시 창작강좌의 수강생일 뿐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시' 그 자체다. 시는 어떤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비루하고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때로는 주책맞고 철없는 어린이 같으며 때로는 타인의 욕망을 선동하고 조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는 인간을 사랑하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시가 추악한 대상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인간을 위한 진실과 정의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영화 '시'의 주인공 미자가 딱 그렇다. 미자는 다소는 주책스럽고 다소는 편협하며 심지어 교활하게 타인을 조종하여 돈을 구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성폭력에 희생된 유가족을 찾아가 웃게 만들어주고 보상하며 무엇보다도 동급생을 성폭행하여 자살로 몰아넣은 자신의 손자를 신고하여 처벌을 받게 한다.

손자를 감옥에 보내는 미자의 결단을 굳이 '시'의 속성에 견주지 않더라도 진정한 사랑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이 무조건적인 보호, 무비판적인 옹호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할머니가 손자의 비행을 은폐하고 감추기가 쉽지, 처벌받게 하고 책임지게 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손자의 인생을 위해서 지금 잘못한 것은 책임지게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잘못을 하고도 책임지지 않으면 잘못한 줄도 모르는 인간이 되기도 쉬우려니와 나중에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시초가 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송창식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노래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로 시작하는 성서의 사랑, 저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면 사랑은 용기와 끈기가 필요하다. 사랑이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으면서 끈덕지게 추구하는 것은 불의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치고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이를 어찌 기뻐할 것인가. 어찌 이를 감추고 왜곡하는 잘못을 함께 저지를 것인가. 앞날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두려워도 죗값을 치르고 반성하여 후일의 숙면을 도모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

탄핵이 성사된 지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이 쏟아져 나온 엄청나게 많은 증언과 비화에 이제는 분노를 넘어 허탈함과 슬픔까지 밀려온다. 그런 중에도 더욱이 끔찍한 것은 저 엄중한 위치에 있던 이가 어쩌면 치료를 받았어야 하는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람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면 병증을 의심하고 진찰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것이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도리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치료 대신 얼토당토 않은 약물만 산더미처럼 사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사태가 모두 정리될 때는 제 역할을 등한히 하면서 그릇된 처분을 한 자들의 잘못도 제대로 따져야 할 것이다. 하긴 달리 생각하여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진짜로 자신을 사랑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하는 인간을 곁에 두지 못한 부덕의 책임도 결국은 스스로 져야 할 일이기는 하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인 '아무개를 사랑하는 모임'과 같은 이름을 가진 단체들이 꽤 있다. 정치란 점검되고 비판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고린도전서에서처럼 사랑을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면 불가능한 표현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무조건이 지나쳐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고 청산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모의하고 감추고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니 이를 어찌 사랑이라고 할 것인가. 피하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제대로 책임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

/윤진현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