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 걸려 아마도 죽어갔을
작은것들의 많고 많은 죽음들
피를 덮고 무수한 외침 덮은채
시간은 흘러 아직도 모르고 화만
망각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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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자그맣지만, 나혼자 살기에 아주 적당한 넓이를 가졌지만, 앞유리창만은 아프리카의 숲에 세운 어떤 커다란 호텔의 창보다도 '멋있다'. 나의 유리창은 일출부터 시작해서 달, 새벽녘의 금성, 구름… 그런 것에 활짝 열려있다. 우리 동네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있는 비탈길은 마치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차들이 힘들게 기어오르는 모습이 보이고 창의 한 옆구리엔 신기루같이, 특히 황혼이면 분홍색으로 소복히 '산 바구니'에 담겨있는 먼 동네의 아파트들도 보인다. 유리창 앞에 펼쳐진 능선은 열두개이고 지난 12월 동지에는 정확히 능선 중앙에 솟은 산 정상에서 해가 떠 올랐다. 물론 여느해처럼 1월이 된 오늘은 다시 해가 그 능선을 걸어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이 식탁에서는 바로 그런 해의 기미가 가장 잘 보이기 때문에, 새벽 무렵 여기 멍하니 앉아있곤 한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얼른 창 앞으로 달려가려고. 그런데 오늘은 놀랍게도 거미를 발견한 것이다.
오랫동안 만지지 않았던 카메라를 황급히 꺼내들고 거미 앞으로 간다. 해가 떠오르려는지 거미가 비쳐보이는 하늘은 주홍색과 회색, 분홍색 등이 어우러져 마치 커다란 추상화 캔버스같다. 아마 정육점에 내걸린 고기를 놀랍게 포착한 추상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캔버스가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도 베이컨같은 이미지 하나 건질지도 몰라, 베이컨보다 내가 나을지도 몰라, 호기스럽게 셔터를 누른다. 의자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찍기도 하고, 발끝을 들고 찍기도 하고 누워서 찍기도 하고…, 혼자 난리를 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그 녀석이 가만히 다리를 오므리는 것이 카메라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중에 걸려있는 듯하던 그 녀석의 주변 허공에 누군가 낙서를 해놓은듯한 무수한 금들이 지저분하게 보인다. 금들의 마디마디에 검은 점들도 보인다. 무엇인가가 그 금, 아니 거미줄에 걸려 죽은 흔적일까…. 해가 구름 위로 올라가고 나서야 나는 '거미 훔쳐보기'를 그만두고 다시 나의 식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저 녀석을 왜 그동안 못 보았을까, 왜 보면서 못 보았을까, 하고. 저 녀석이 하늘에 매달려 끊임없이 다리를 오무렸다, 폈다, 밑으로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는, 그 분주한 삶과의 사투를 왜 몰랐을까고. 왜 거기 깨끗한 허공과 구름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소설가 김승옥은 그의 출세작이며 몇 편 안되는 그의 소설중의 하나인 '무진기행'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번에 자네가 전무가 되는 건 틀림없는 거구, 그러니 자네 한 일주일 동안 시골에 내려가서 긴장을 풀고 푹 쉬었다가 오게. 전무님이 되면 책임이 더 무거워질 테니 말야" 아내와 장인 영감은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퍽 영리한 권유를 내게 한 셈이었다… 버스는 무진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마전 나는 김승옥의 그 소설을 동생집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가져왔다. 우리의 20대가 그려진 그 아름다운, 그러나 안개투성이인 무진, 자본 산업화가 마악 심각해지던 시절의 몇 모습들, 대학 졸업장이 금박종이 이던 그런 시절, 와이셔츠 입은 사람들을 무조건 우러러보던 시절의 몇 모습들, 돈많은 아내의 능력으로 출세할 모양인 주인공의 무기력한 몇 모습들…. 금수저 은수저의 원조들, 갑질의 원조들, 왜 이런 것들을 잊고 있었는가. 왜 우리는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는가. 그 무수한 싸움과 절망들을, 젊은이들이 선봉에 섰던 '횃불'의 성공들이 이미 있었음을 우리는 왜 잊고 있는가. 아, 저 거미가 저렇게 유리창 한 구석에 매달려 있는 것을, 왜 그동안 보지 못했는가, 거미줄에 걸려 아마도 죽어갔을 날파리보다도 작은 것들의 무수한 죽음도. 하긴 시간은 피를 덮고 무수한 외침을 덮고 흘러가지. 그걸 아직도 모르고 화를 내다니, 망각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도.
/강은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