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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전기에 감전된 듯, 그리운 사람이 '확' 떠오를 때가 있다. 그가 옛 애인일 수도 있고,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일 수도 있고, 사춘기 학교 가는 길에 늘 마주쳤던 이름모를 소녀일 수도 있다.

오주석 형이 내겐 그런 경우다. 내가 주석이 형을 처음 본 건 35년 전 수원 팔달산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대학생 동아리 음악회에서였다. 그때 형은 기타로 슈베르트의 '밤과 꿈'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음악을 들으면 긴 머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연주하던 그때 형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몇년 후, 피아니스트 잉그리드 헤블러 독주회가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는데 연주가 모두 끝나자 누군가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주석이 형이었다.

그런 주석이 형과 마침내 단 둘이 대화를 나눈 것은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였다. 그때 주석이 형은 그곳에서 연구원으로 있었고, 취재를 갔던 신출내기 기자와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여러 인연이 겹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공교롭게도 내가 살던 아파트에 주석이 형이 이사를 왔다. 복도식 아파트라 203호에 살았던 나는 201호의 형집 앞을 거의 3년을 지나다녔다. 가끔 양쪽 집을 오가며 술자리가 열리곤 했는데 음악과 미술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형이 수원 매산로 본가로 옮기면서 만남은 끊겼다. 그 후 형은 단원 김홍도 연구로 일가를 이루었고, '한국의 美 특강'을 시작으로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최고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던 주석이 형은 그의 나이 49세 되던 2005년 2월 5일 하늘나라로 떠났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불붙인 촛불이 전국적으로 너울거리던 지난 2016년 12월 15일 수원시청 중회의실에서는 매우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故 오주석 선생 자료기증 협약식'. 수원 출신 미술사학자 오주석의 저서와 형의 땀이 그대로 배어 있는 연구자료 5천점을 보관중이던 역사연구소가 그날 그 모든 것을 수원시에 기증한 것이다. 솔직히 나는 촛불에 취해 이 행사가 열리는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 내 자신을 수없이 질책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후였다. 다행히 영상자료가 있어 그날 행사를 지금 다시 보고 있다. 사무치는 이 그리움을 어찌해야 할지,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