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부는 플랫폼만 만들고
구체적 정책 결정·집행은
지방정부에 맡기면 더 효율적
지방을 중앙출장소로 방치해선
4차산업혁명은 무망한 꿈

권한 배분만이 지방자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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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수원시정연구원장
한국경제가 사면초가이다. 기간산업의 구조조정에 실패하면서 저성장의 늪에 빠져있다. 저출산 고령사회를 방치하다 뒤늦게 엄청난 돈을 쓰지만 효과가 없다. 안이한 경기부양정책은 가계부채만 누적시켰다. 신보호무역주의 확산으로 수출주도형 경제가 위험하다. 경쟁국은 제4차 산업혁명을 향해 달려가는데 정경유착의 부패고리가 발목을 잡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내재적 결함 때문에 위기가 반복된다. 그래서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부도 실패한다. 한국경제의 위기는 대내외 여건변화와 시장 및 정부 동시실패가 초래한 복합위기이다.

세습재벌체제가 시장경쟁의 효율성을 훼손한 지 오래다. 부패한 정관계 유착구조가 정부의 실패를 만성화하고 있다. 국가몰락을 우려하는 이가 많다. 게다가 탄핵정국으로 관료정부는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할 의지도 역량도 없어 보인다. 유사한 정책을 되풀이하면서 경기회복은커녕 재정위기만 가중시키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어떤 획기적 정책수단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위기이며,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전환기적 위기이다. 정치·경제·사회시스템의 전면적 개편을 요구하는 위기이다. 국가운영의 기본 틀인 헌법 개정을 공론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 체제개혁은 가능할까? 정치권의 개헌논의를 보면 쉽지 않아 보인다. 반복되는 부패의 근원을 제왕적 대통령제로 보고 이를 분권형으로 바꾸자. 여기까지는 옳다. 그런데 중앙정치권은 이원집정부제나 책임총리제 등에 몰입하고 있다. 그렇게 바꾸면 정부의 실패를 막을 수 있을까. 단언코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근원은 개발독재시대에 구축된 강고한 중앙집권체제이다. 이것이 재벌지배체제의 불공정·비효율·부패의 핵심기제이다.

선진국을 보면 지방분권이 잘 되고 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혼합경제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국가경쟁력도 높고 혁신성·안정성·지속가능성도 높다. 시장경제의 경쟁체제를 확립하고 시장의 실패는 효율적 정부체제가 보완한다. 효율적 정부체제는 전국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강고한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지역의 다양성이 발휘되는 유연한 지방분권체제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체제에서는 집권적인 항모선단체제가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정보통신혁명이 초래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탄력적인 분권체제가 필연이다.

우리는 중앙집권체제의 폐해를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세월호의 비극만하더라도 만일 위기관리권한이 자치단체장에 있었다면 그렇게 구조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메르스 사태도 지방정부의 탄력적 대응이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 최근 AI와 구제역사태도 중앙당국이 초기 확산을 제어하지 못한 탓이다. 10년 이상 지속된 지역혁신정책이 답보상태인 것도 중앙정부의 획일적 정책 때문이다. 오히려 주민주도로 성공한 사례가 많다.

대통령을 바꾼다한들 집권체제의 통제기제가 온존되는 한 주민의 삶도 위험하고 지역혁신도 어렵다. 요컨대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경직적인 중앙집권체제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중앙정부는 플랫폼만 만들고 구체적인 정책결정과 집행은 지방정부에 맡기면 더 효율적이다. 민주적 거버넌스를 통한 행정혁신도 자치정부가 더 잘하고 있다.

지방분권개혁은 유럽자치헌장에 명시된 보완성의 원리에 맞게 권한과 재원을 배분하고, 주민의 참여기제를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다. 주민의 삶에 직결된 모든 권한은 기초정부에 우선 배분하고, 기초정부가 할 수 없는 것은 광역정부가, 광역정부도 할 수 없는 것은 중앙정부가 담당한다. 징세권의 배분도 권한배분에 비례하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배분해야 한다. 다만 중앙정부는 반드시 지역 간 격차를 보정해야 한다.

지방의 세출규모가 커져도 기관위임사무나 의무강제에 의한 것이라면, 지방의 세입규모가 커져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이전재원중심이라면 지방자치가 아니다. 지금처럼 지방정부를 중앙정부 지방출장소로 방치하고는 제4차 산업혁명은 무망한 꿈이다. 분권은 지방분권이다.

/이재은 수원시정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