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과 존엄성 지켜내는
정치·사회를 원했기 때문
다시는 그들만의 어둠 속에서
지배하려 들지 않기를 바란다
지켜보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
1961년과 1987년 두 차례 우리는 어제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그 사건들은 본연의 정신을 배반당한 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우리가 원했던 변혁은 배반당했으며, 우리 일상은 반동과 퇴행으로 얼룩지게 되었던가. 왜 여전히 우리는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과 집회를 되풀이해야만 했던 것일까.
지난 금요일의 탄핵 선고는 전적으로 우리의 외침이 만들어낸 소중한 성취였다. 이 성과는 결코 국회의 탄핵 의결이나 헌법재판소의 최종 인용 판결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 성취는 전적으로 지난 몇 달 사이 20여 차례에 걸쳐 촛불을 들고 전국에서 연인원 1천600만 명이 이르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와 함께 정치와 법이, 우리 사회가 이런 요구와 외침을 듣고 그 목소리에 순응할 만큼 성숙했기 때문이었음도 분명 사실이다.
지난 2011년 이후 중동 지역에서 있었던 이른바 쟈스민 혁명을 생각해보라. 튀니지의 한 청년이 불의한 삶에 항의하며 들었던 작은 꽃 한 송이가 중동 지역 전역으로 펴져나간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그 불씨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또한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최고통치자를 몰아내고, 사회체제 전체를 바꾸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그 이후 300만 명이 넘는 국제 난민을 만들어 내거나, 또는 그 이전의 삶에 어떤 의미 있는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 퇴행의 시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지금, 탄핵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촛불을 들었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는 정치와 사회이다. 우리는 이 시간이 다시는 퇴행하지 않기를 원한다. 촛불을 든 우리는 불의와 사익에 점철된 잘못된 사회와 체제가 바뀌기를 원한다. 우리는 다만 대통령이 박근혜에서 다른 그 누구로 바뀌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선주자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개헌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체제를 원한다.
우리는 법이 그들만의 특별한 권리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보호하고 공동선을 지켜가는 것이기를 원한다. 우리는 대통령과 정치권의 검은 이해관계를 감추는 관변 언론이 아니라, 그 어두움을 밝히는 언론을 원한다. 정유라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존중받는 인간을 위한 교육을 원한다.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사드를 배치하여 전쟁 공포를 드높이는 정치가 사라지기를, 종북몰이로 시민을 편가르고 억압하는 정치가 바뀌기를 원한다. 촛불을 들었던 우리는 기업이 재벌이 되어 수많은 검은 돈을 그들끼리 불의하게 나눠 갖는 그런 사회와 경제가 바뀌기를 원한다.
이런 사회를 원했던 것이 촛불임에도 언론과 정치권은 촛불을 그들끼리의 권력놀이에 악용하려 한다. 그들은 이 외침을 대선놀이로, 이명박 박근혜의 선의니 그들과 대연정하느니 따위의 헛소리로 듣는다. 우리가 촛불 아래 모인 까닭은 우리를 '개돼지'로 보면서 통치하려드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과 존엄성을 지켜내는 그런 정치와 사회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촛불의 요구가 배반당해 다시금 촛불 아래 모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시는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그들만의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려 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지켜보고, 살펴보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촛불 이후의 일상은 그렇게 이어가는 삶의 시간일 것이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