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
허허로운 결기만 남긴 메시지에 심란
스탕달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새로운 문예사조의 선구자다.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同時代) 현실의 객관적 재현을 지향한다. 소설 '적과 흑'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사실 더 주목받는 작품이 있다. 바로 '파르마의 수도원(La Chartreuse de Parme)'이다. 이탈리아 한 지역에서 영사로 재직하던 무렵 교황 파울로 3세의 비화를 담은 옛 문서를 직접 접한 뒤 영감을 얻었다. 앙드레 지드는 이 소설을 "프랑스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칭송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발자크 역시 "모든 면에서 완벽함이 돋보인다"고 극찬했다.
이 소설을 리얼리즘의 대표작품으로 손꼽게 만든 장면 중 하나가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한 뒤 치른 최후의 격전 '워털루 전투'다. 스탕달이 재현한 전투는 낭만주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도 등장하는 '워털루 전투'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위고의 '워털루 전투'는 신화와 현실이 교차하는 무대다. 영웅이 등장하고 황제의 권위는 신적이다. 반면 스탕달이 재현한 '워털루 전투'는 인간의 진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철저한 현실이다. 등장인물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심지어 추하기까지 하다. 비록 높은 지위를 가졌다 해도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장군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하사에게 말했다. "병사 네 명을 나한테 주게. 나를 위생부대로 데려가야 하니까. 다리가 부러졌거든." "망할 놈"하고 하사는 대답했다. "오늘 네 놈도, 다른 장군 놈들도 모두 황제를 배반했어." "뭐라고?" 장군은 화를 냈다. "내 명령을 못 알아듣는군. 나는 백작이야. 자네들 사단을 지휘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면서 장군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파르마의 수도원' 중에서)/
리얼리즘은 이전에는 위대하게 보이던 것을 해부해 그 공허함을 드러내 보인다. 아름답게 보인 것의 껍질을 벗겨서 그 적나라한 진상을 폭로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난 석 달 동안 겪은 일들은 한 편의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지존(至尊)의 위상은 철저하게 해부됐고, 스스로 그 공허함의 정점에 섰다.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던 이야기는 추한 속살을 드러내보였다. 평범한 시민들이 역사의 한 장을 펼쳤다. 지난해 12월 3일 야3당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로 시작된 이 소설 같은 현실은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으로 끝맺음을 했다. 지난 일요일 밤, 집에서 TV를 통해 지켜봤던 삼성동으로 향하는 대통령의 귀로(歸路)는 에필로그였다.
그런데 심란하다. 지지하고 반대하고의 차원이 아니다.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절반을 훨씬 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8년 동안의 임기를 끝내고 백악관을 떠나던 모습과 우리의 18대 대통령이 5년의 임기마저 채우지 못한 채 청와대를 떠나는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작별을 고하는 메시지 또한 달랐다. "서로 달라도 하나로 함께 일어서는 것"이라는 오바마의 마지막 연설은 민주주의를 위한 기도였다. 우리 대통령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며 허허로운 결기만 남겼다. 문제는 대통령의 '삼성동 사저'가 소설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은거한 '파르마의 수도원'이 아니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심란하다.
/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