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관리 이동 돕는 시설, 책임자엔 특전도
현 영화초교 사거리 부근 추정… 복원 기대
한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물자나 사람들의 이동이 원활해야 합니다. 특히,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과 통신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아주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통·통신의 발달 수준이 국가 경쟁력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전근대 시대의 교통·통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역(驛)입니다. 오늘날 철도가 출발하고 머무는 서울역, 수원역하는 역(驛)이 바로 같은 역입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육로를 연결하는 교통로 중요 지점에 역(驛)을 두고 관리들의 이동을 도왔습니다. 역에는 당연히 말을 준비해서 언제든지 관리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중앙의 관리들이 전국의 역에서 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패를 징표로 제시했습니다. 역에 근무하는 관리를 역리(驛吏)라고 하고, 역에 근무하는 공노비를 역졸(驛卒)이라고 불렀습니다. 국가에서는 역에 들어가는 운용 경비나 역리나 역졸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역둔토를 내려 주었습니다.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 임금은 수원의 발전을 항상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다양한 지원책을 펼쳤는데, 그 중에 하나가 화성 장안문 밖에 '역'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화성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정조는 장안문 밖에 집들이 뜨문뜨문 있어서 수원을 막고 호위하는 형세가 부족하다고 하여, 서울의 양재역을 옮겨 말과 숙소를 설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때가 1796년 8월 29일입니다. 그리고 역의 이름을 '영화(迎華)'로 바꾸도록 명하였습니다.
'영화(迎華)'는 화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역의 책임자인 찰방(察訪)에게는 가족을 데리고 임지로 부임하도록 허락하였으니, 대개 격식 밖의 특전이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의 '영화역도'를 보면 관사는 정당(正堂) 및 삼문(三門)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아울러 안쪽 관아와 바깥 건물은 모두 50여 칸으로 역의 북쪽에는 역마가 뛰노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하여 영화역 주변은 몇 개월 사이에 새로 모여든 집이 즐비하여 취락을 이룬 것이 마치 하나의 작은 현과 비슷하였답니다.
영화역은 수원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시설이었습니다. 지금 송죽동의 만석거에는 영화정(迎華亭)이라는 정자도 있습니다. 현재 영화정은 그림대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영화역은 정확하게 어느 지점인지 불확실합니다. 대충 어디쯤일 것이라는 짐작은 갑니다. '수원지명총람'에는 영화역의 위치를 '수원교육청 사거리 부근'으로 추정했고, 다른 일각에서는 '영화동사무소 일대'로 보기도 합니다.
영화역은 1896년 폐지돼 120년이 더 지나서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길과 물길도 변하고 주변의 지형지물이 많이 변해 정확하게 영화역의 위치를 고증하기는 힘들지만, '화성성역의궤'의 '도설 화성전도', '영화역도', '화성도 병풍그림', '화성지'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대체적인 위치를 영화초교 사거리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답니다.
현대에는 전근대 시대의 문화콘텐츠를 복원해 활용하는 게 새로운 흐름입니다. 전국에는 영화역 같이 기록과 설계도가 있는 역사 흔적이 많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과거의 영화역을 복원해 역사와 문화를 꽃 피웠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화성과 행궁을 제대로 복원한 수원의 저력을 영화역 복원에도 발휘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찬수 동원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