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나라를 잃어버렸다
돈보다 '사람' 이윤보다 '생명'
우선가치임을 세월호사건 통해
반성했지만 이번 헌재 판결은
생명보다 돈의 가치를 앞에 놓았다
대통령 탄핵심판사건 결정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익과 손실이라니, 법의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 회계장부 같은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 문장을 그냥 기술적인 언어표현상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문득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는 장면이 생각났다. 왕의 첫 질문은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가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맹자는 이(利)를 먼저 묻는 왕의 잘못을 지적한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또한,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정의보다 이익의 논리가 더 설득력을 얻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망국의 징조다. 어째서 법관은 하필 손익을 말하였는가.
결정문을 다운받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재판관들이 가장 공을 들여 탄핵사유로서 입증해낸 부분은 '사인(私人)의 국정개입 허용과 대통령의 권한 남용 여부'에 대한 판단 부분이었다. 재판부는 대통령으로서의 직권을 남용하여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한 것을 가장 중요한 '위헌적 행위'로 보았다. 반면에 가장 중요한 탄핵소추사유라고 생각했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책임, 즉 생명권 보호의무와 성실한 직책수행의무의 위반은 탄핵사유로 인정되지 않았다. 형식적으론 재판부 전원일치의 통쾌한 판결로 보였지만, 내용적으로는 기뻐할 수만은 없는 '최소의 판결'이었다.
일반법정과 달리 헌법재판소는 헌법을 최종적으로 유권해석 하는 기관이다. 이번 사건에서 생명권 보호의무와 대통령의 성실의무에 대한 헌재의 유권해석은 상식과 정의의 기준에서 모두 벗어났다. 앞으로 법적 절차가 진행되겠지만 적어도 그 부분에 관한한 이미 헌법적 사면을 받은 박 전 대통령에게 하위법정이 어떤 죄를 물을 수 있을까. 김이수, 이진성, 두 재판관이 낸 보충의견을 보면 법리상 거의 반박 불가할 정도로 충분히 세월호 사건 당시 대통령으로서의 성실의무 위반 사항이 입증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스스로 기각시킨 것은 분명 모순적 판결이다. 반면 안창호 재판관의 보충의견2는 해당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정치제도에 대한 개인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판결문에 넣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견일 뿐이다. 심지어 그것은 파면당한 박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여러 차례 피력해온, 보수재집권을 위한 개헌론과 사실상 같은 맥락의 주장이었다. 왜 정의가 아니라 손익을 말했는지가 다시금 자명해졌다. 저 문장은 이 나라 지배층을 대표하는 법관들의 무의식의 반영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이번 탄핵판결로 법의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헛기침 같은 칭송을 한다. 어떤 미학적 현혹도 우리의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정미 재판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며 위압적이지도 않았다. 강일원 재판관의 여유 있는 표정은 포용력 있어 보였다. 하지만 판결의 실제 의미와 영향력은 그들의 인상과 표정이 아니라 결정문 내용에 있다.
세월호 사건은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잘 사는 나라만 보고 달려오다가 정의로운 나라를 잃어버렸다. '돈보다 사람',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 가치여야 한다는 것은 416을 통한 공통의 반성이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그러나 이번 헌재의 판결은 다시 생명보다 돈의 가치를 앞에 놓았다. 파면당한 대통령은 지금도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가라앉은 세월호 앞에서도 진실을 감추고 저마다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려했던 괴물들. 국가는 그런 괴물들의 복합적 총체였다. 다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은 어떤가. 표를 위한 '통합'과 '대연정'은 결국 '이익의 대연합'일 수밖에 없다. 그건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이다.
왜 나라는 이익을 앞세워선 안되는 것인가. 맹자는 이렇게 답하였다. "왕은 '어떻게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할까' 말하며, 대부는 '어떻게 나의 가문을 이롭게 할까' 물으며, 선비와 서인들은 '어떻게 나를 이롭게 할까' 라 할 것이니, 위와 아래가 일제히 이익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극히 위태롭다.
/채효정 정치학자·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