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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 21일 인천 소래포구 전경. 물양장 등이 조성되지않은 채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경인일보DB

1960년대 기존 원주민에 밀려난 '황해도 피란민'
연안에서 새우잡이하며 새로운 포구 개척·정착
남북대립 등으로 쇠퇴한 시흥 포리 기능 대신해

이슈 & 스토리1993년6월21일소래포구전경
소래포구 화재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는데, 이참에 소래포구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도 새롭게 관심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수도권 유명 관광지인 소래포구는 전통적으로 포구의 역할을 하던 곳이 아니었다.

현재 소래포구가 있는 노렴나루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황무지였는데, 실향민이 하나둘 자리 잡으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천과 시흥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녔던 조용한 나루가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수도권 유명 관광지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는 무수한 사연이 있다.

최근 발생한 화재로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소래포구 어시장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 시흥 포리에서 소래포구로

소래포구 일대에서는 본래 '포리(현 시흥시 포동)'가 포구의 기능을 했다. 포리는 소래포구에서 하구 안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한다.

시흥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시흥시사'를 보면 포리는 조선시대 고지도에도 포촌리, 포리포 등으로 불리는 큰 어촌이었다. 1909년 인구조사에서 인천부의 면별 어업호구를 보면 영종면, 덕적면에 이어 포리가 속한 신현면이 3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포리의 어업활동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리 마을이 가장 번성한 시기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였다고 한다. 포리의 1936년 인구는 700~800명에, 호수는 150여 호로 대부분 어민이었는데, 어업이 번창할 때에는 연평도까지 조기를 잡으러 갔다. 이렇게 번성했던 포리가 지금 잊혀진 포구가 된 데에는 소래포구의 부상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포리의 쇠락에는 이유가 많다. 우선 1937년 12월 1일 개통한 수인선의 소래철교가 포리 통행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포리를 다녔던 '중선배'와 같은 큰 선박의 높다란 돛이 소래철교에 걸려 포리 포구로 이동이 어렵게 됐다.

동아일보 1936년 6월21일자에는 '경동철교 가설은 7백 어민 사활문제-선박통행을 못하는 까닭에 관계주민 당국에 진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철도국에서 포리로 가는 배가 소래철교 밑을 통과할 수 있도록 철교 가운데를 높여 만들고, 모든 배에 꺾는 돛대를 만들어주었지만, 포리 통행의 불편함은 해소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 분단, 싹쓸이 어업 등으로 연평어장이 쇠퇴한 것도 포리가 몰락한 원인으로 꼽힌다. 포리에서 발생한 일명 '포리호사건'도 포리 주민들에게 곤욕을 치르게 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경기도편(1978)'에는 포리호사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포리 마을 유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자금을 차용해 당시 시가 3천만원의 동력선을 구입했는데, 이 동력선이 목포 앞바다에서 간첩에 납치됐고 침몰하게 됐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포리 주민들이 '재기불능' 상태가 됐다고 전한다. 포리호 사건은 1960년에 일어났다.

이슈 & 스토리 소래 어시장5
① 소래포구를 모항으로 삼아 인천 앞 바다에서 꽃게, 새우 등을 잡는 어선들이 소래어시장 앞에 정박해 있다. ② 우럭, 광어 등 갓 잡은 각종 생선들이 가지런히 놓인 채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다. ③ 옛 모습을 간직한 포구 위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다. /경인일보DB

# 실향민이 키운 소래포구

현재 소래포구가 있는 노렴나루 일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부터다. 1950년대 소래포구 인근에 위치한 '노렴마을'은 소래염전 등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사는 수십 호 단위 마을이 있었지만, 노렴나루 일대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런 노렴나루는 실향민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성장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펴낸 '인천연안의 어업과 염업'이란 책에는 "1963년 당시 실향민 6가구 17명이 전마선, 범선(무동력선) 등으로 연안에서 새우잡이를 시작했다"고 당시 노렴나루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인천 중구, 동구 등지에 터를 잡았던 피란민들이 원주민에 밀려 황량한 소래포구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수부두, 만석부두 등 인천 지역에 전통적인 포구가 붐벼 자리를 잡기 어렵게 되자 새로 포구를 개척하게 됐다는 것이다.

'시흥시사'는 "소래어촌은 이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의 해안정착촌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새우잡이를 위하여 1960년대 초 인근 도서지방과 인천 연안부두 어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이 황해도 피란민들이었다"고 기술했다.

인하대박물관에서 펴낸 '인천장도포대지'에 수록된 '노렴 마을과 소래 포구의 민속생활문화(2003)'에는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해 만석동에서 생활하다 1969년 소래포구로 이주했다는 장영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실렸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소래포구의 13번째 주민이었다고 했다.

당시 소래포구의 가옥들은 소위 '루핑(기름종이 지붕)' 지붕 일색이었다. 할아버지는 소래포구에 오면서 벽돌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렸는데, 주민들은 할아버지의 집을 못 보던 방식으로 새로 지었다고 해서 '새집'이라고 불렀다.

소래포구는 분단의 아픔을 그린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소설가 이원규의 단편 '포구의 황혼' 주인공의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 출신 실향민 박영구라는 인물이다. 소래포구에서 어선을 부린 박영구는 북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언제나 연평도 주변 어장에만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이 소설 말미에는 박영구가 북에 있는 가족에 편지를 보내는 대목이 나온다. 박영구는 편지를 넣은 플라스틱 병을 바다에 띄워 보낸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제지하다가 그대로 내버려둔다.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시선을 오래 멎게 하는 구절이다.

"세월이 또 무상허게 흘너갓소. 두 번이나 당신과 아이들을 버린 거슬 용서하오. 이제 늘거 귀눈 흐려지고 수족도 차겁소. 주글 날이 을마 안나마 다시 당신과 아이들을 몯 볼 거 갓소. 남쪽 아이들 이름과 나이가 용규 31살 용철 28살 진숙 26살 용진 23살이라는 걸 거기 아이들이 잇지 안케 해주오. 인천 소래 포구 박영구 씀."

/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