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1株 민족기업' 주주 모집
경쟁약한 북한지역 개척 성공

경성방직은 초대사장에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인 박영효를, 전무취체역에는 마포 물산객주 출신인 박용희를, 취체역 겸 지배인에는 이강현을 각각 임명했다. 본사는 포목상 집결지인 남대문통 5정목에 두고, 공장은 영등포(현 타임스퀘어 일대)에 5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경성방직은 조업 시작도 못하고 위기에 직면한다. 이강현이 일본 삼품(三品, 면화·면사·면포) 선물거래에 손을 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쟁특수로 '삼품투기'가 횡행했는데, 1920년 봄부터 시세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경성방직은 13만2천550원의 손실을 입고 파탄지경에 이른다.
김성수는 위기 타개를 위해 고향 줄포로 내려가 양부(養父)와 실부(實父)에게 재산 투입을 간청했다가 거절 당한다. 하지만 단식이라는 초강수 끝에 3일 만에 토지 담보를 승낙받아 조선식산은행에서 8만원을 융자받아 위기를 넘겼다.
경성방직은 1922년 6월에는 조선총독부에 지원금을 요청해 연말에 허가를 받아낸다. 1931년까지 일본정부의 보조금은 총 21만9천원에 달했는데, 경영진의 적극적인 대정부 활동의 결과였다. 기사회생한 경방은 1923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조업을 개시, 일본산 면사를 원료로 '삼각산' 브랜드의 광목을 월 5천필(疋)씩 생산했다.
김성수는 가문의 땅을 일부 매각해 1920년 4월 동아일보사를 창간했다. 그는 기업활동보다 정치·사회운동에 열심이었던 탓에, 1921년에 경도제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아우 김연수(27세)가 경성직뉴 전무와 경성방직 상무가 되어 사업 일체를 전담한다.
김연수는 취임과 함께 경성직뉴를 고무신공장으로 전환해 '별표'고무신을 생산했다. 당시 국내 신발시장은 민족계인 대륙고무와 일본인 소유의 제등고무가 석권했는데, 경성직뉴의 후신인 중앙상공은 1920년대 중반부터 국내 유수의 고무신 메이커로 자리매김한다.
김연수는 주력기업인 경성방직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고심했으나 동양방적과 조선방직 등 일본기업들이 장악한 남한지역 시장은 개척이 쉽지 않았다. 이에따라 1924년부터 경쟁이 덜한 북한지역을 공략해 재고품과 생산분 대부분을 판매하는 성공을 거둔다.
경성방직은 1925년에 창업 이래 두번째 위기에 직면한다. 을축년 대홍수가 경성방직의 영등포공장을 강타한 것이다. 300여 직원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17일 아침 기계는 물론 원사와 제품·반제품 1만4천필이 완전히 침수됐다.
7월 20일부터 해가 나자, 전 직원이 흙탕물로 범벅이 된 광목 세탁에 매달렸다. 이때 공장 주변은 물론 여의도까지 광목으로 하얗게 덮였다고 한다. 침수된 기계설비 수리에만 대략 2개월이 걸렸다.
김연수가 설립 초기 판매부진으로 인한 경영위기를 극복한 것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덕으로 추정된다. 3·1운동 직후부터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1923년 초 전국으로 확대됐다. 경성방직은 민족계 기업 중 규모가 가장 컸고, 당시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경영하고 있어 경쟁업체들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