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구분법 이젠 뛰어 넘어야
어떠한 손실·희생도 없는 진보란
있을 수 없다는 말 되새길 필요
'진보'·'보수'라는 말부터 허상
헛것이 눈 어지럽히는것 같아

이름과 같은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어제 관부에서는 전직 최고책임자를 구속하는 신청을 냈다 하니, 근 십 년 전 일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결코 유쾌해 할 일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며 그밖의 온갖 부정적 사건들은 전혀 정리, 정돈되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불행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대통령 선거는 이번에는 더욱더 진보다, 보수다, 하는 슬로건으로 뒤덮일 것 같다. 이번에는 물론 이른바 보수에게 기회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비록 보수, 진보로 후보들이 나뉜다 해도 운동장은 이른바 진보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다. 자업자득이니 상대방을, 국민들을 탓할 수도 없다.
대체로 이번에는 진보 쪽이 유리할 거라고들 예견한다. 후보들도 보수냐 진보냐, 좌냐 우냐 하는 이념의 스펙트럼을 따라 재단, 평가되는 추세다.
예를 들어, 민주당을 보면 시장 출신 후보가 가장 왼쪽, 지난 번에 이어 다시 나온 후보가 그 다음 왼쪽, 이른바 '선의' 파동에 '대연정' 구상으로 다른 당 지지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보는 그중 오른쪽에 가깝다고들 한다.
이번에는 국민의 당의 유력 후보. 컴퓨터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희망 메시지로 정계에 들어선 그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은 그를 향해 집권 여당의 이중대다, 보수대연합 들러리다 했지만, 최고책임자와 함께 침몰해 버린 지난 여당이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지금 그런 비난은 근거가 없다. 그밖의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 관망중이다. 더디고 느린 그의 상승 곡선이 이를 말해준다.
왜 그럴까?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그중 한 가지 중요한 이유, 그것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구획선에 그가 꼭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대하는 태도를 보고 보수라고 하고 보면 청년, 실업, 복지에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적폐 청산에 사활을 건다. 진보에 가깝다고 보고 싶기도 한데 4차산업혁명 시대 얘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규모의 경제학에도 무관심하지 않은 듯하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불투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얘기가 길어졌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어서다. 바른당도 있다. 두 후보 중 지난 국회의원 총선거 때 공천 파동을 겪은 후보는 개혁 보수의 적임자임을 표방한다. 국회 원내총무로 연설한 것이 최고 책임자와 불화를 겪는 결정적 사유가 되었는데, 개혁 중도가 아니라 보수 적자임을, 거기에 보수 연대를 주장한다. 영남 지역 중심의 소대표성에 만족하려는 게 아니라면 납득 잘 안가는 슬로건이다. 또 한 후보는 모병제를 주장한 것이 특이해 보였는데, 과연 이것이 현실성 있게 들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젊고 개혁적인 보수는 모병제라도 얼마든지 수용 가능한 걸까?
마지막으로, 자유한국당. 모래시계로 널리 알려진 후보는 보수 적통임을 표방하는데, 티비나 라디오에서 반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 어법을 보정하는 것이 급선무 같고, 다른 한 후보는 아직도 무너져내린 낡은 레짐에 관심이 있다. 그것이 극보수 이념성 이전에 윤리적인 차원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 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모두들 이 후보들을 향해 좌우니, 진보, 보수니를 말한다. 하지만 심히 귀에 거슬리는 어법이다. 오히려 이번 대선은 그런 낡은 구분법을 뛰어넘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 진보와 관련하여, 어떤 손실도, 희생도 없는 진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진보는 그 말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곧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영국 작가 헉슬리는 소설 속에서 그런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모든 진보에는 손실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글을 접하면서 생각했다. 그러고도 진보를 지지하고 믿을 수 있을까?
요즘에는 생각이 더 달라졌다. 그 진보라는 말, 보수라는 말부터가 허상이라는 것이다. 헛것이 자꾸 눈을 어지럽히는 대선이라고나 할까.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