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조기대선을 준비하는 범보수 진영의 핵심 키워드는 후보 단일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야권 대선주자들에 크게 뒤처진 현 국면에서 반전을 꾀하려면 중도·우파들이 힘을 합쳐 '1대1 대결구도'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대선주자 토론회에서 단일화 논란이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각 당 지도부와 '제3 지대'에서 연일 단일화 군불 때기가 이뤄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움직임은 과거의 후보 단일화 논의와는 정반대 양상이다. 역대 대선에서 단일화는 야권의 전유물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보수 정당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만큼 보수 정당들의 위기감이 크다는 방증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6차례의 대선을 살펴보면 1992년 14대 대선을 제외하면 민주당 계열 정당을 위주로 크고 작은 단일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첫 시도는 87년 13대 대선이었다.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주정권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 속에 야권의 두 유력 주자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 결국 따로따로 출마했고, 당시 야권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승리를 헌납했다는 자조적인 평가가 나왔다.
당시 YS와 DJ가 각각 28.0%, 27.0%로 야권표를 나눠 가졌고, 노 전 대통령은 역대 최소치인 36.6%의 득표율로 대선고지 등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실패한 단일화가 첫 결실을 본 것은 10년 뒤인 1997년 15대 대선이다.
새정치국민회의를 이끌던 DJ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가 97년 11월 3일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하고 'DJP 연합'을 이뤘다. 이를 통해 양측은 단일 대선후보로 DJ를 내세우고, 당선할 경우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호남과 충청, 진보와 보수가 손을 잡은 DJP 연합으로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김종필 총재도 국무총리에 올랐다.
이어진 2002년 16대 대선에서의 단일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방선거 참패와 DJ 아들 비리 등의 악재로 지지율 추락을 면치 못하는 사이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를 계기로 주가를 끌어올리며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 후보교체론까지 나왔다.
두 사람은 구체적인 단일화 방식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으나, 노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졌던 여론조사 방식 등을 막판 수용하면서 합의를 이뤘다.
결국, 2002년 11월 24일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승리한 노 전 대통령은 대선 전날 밤 정 대표의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유력 주자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민주당 이인제 후보 사이에서 단일화 논의가 오갔으나 워낙 이명박 전 대통령이 큰 격차로 앞서있던 상황이어서 성사되지는 못했다.
직전 대선인 2012년 18대 대선은 야권이 후보를 단일화했음에도 패배한 첫 사례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을 노출하다 11월 23일 안 후보가 전격 사퇴하는 형식으로 단일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의 후보 단일화와 달리 후보 간 합의 대신 한쪽의 포기로 이뤄진 당시 단일화는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첫 단일화 시도에 나선 범보수 진영으로서는 과거 야권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 삼아 내부 진통을 최소화한 '아름다운 단일화'를 이뤄야 해볼 만한 승부를 연출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야권 대선주자들에 크게 뒤처진 현 국면에서 반전을 꾀하려면 중도·우파들이 힘을 합쳐 '1대1 대결구도'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대선주자 토론회에서 단일화 논란이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각 당 지도부와 '제3 지대'에서 연일 단일화 군불 때기가 이뤄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움직임은 과거의 후보 단일화 논의와는 정반대 양상이다. 역대 대선에서 단일화는 야권의 전유물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보수 정당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만큼 보수 정당들의 위기감이 크다는 방증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6차례의 대선을 살펴보면 1992년 14대 대선을 제외하면 민주당 계열 정당을 위주로 크고 작은 단일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첫 시도는 87년 13대 대선이었다.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주정권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 속에 야권의 두 유력 주자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 결국 따로따로 출마했고, 당시 야권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승리를 헌납했다는 자조적인 평가가 나왔다.
당시 YS와 DJ가 각각 28.0%, 27.0%로 야권표를 나눠 가졌고, 노 전 대통령은 역대 최소치인 36.6%의 득표율로 대선고지 등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실패한 단일화가 첫 결실을 본 것은 10년 뒤인 1997년 15대 대선이다.
새정치국민회의를 이끌던 DJ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가 97년 11월 3일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하고 'DJP 연합'을 이뤘다. 이를 통해 양측은 단일 대선후보로 DJ를 내세우고, 당선할 경우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호남과 충청, 진보와 보수가 손을 잡은 DJP 연합으로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김종필 총재도 국무총리에 올랐다.
이어진 2002년 16대 대선에서의 단일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방선거 참패와 DJ 아들 비리 등의 악재로 지지율 추락을 면치 못하는 사이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를 계기로 주가를 끌어올리며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 후보교체론까지 나왔다.
두 사람은 구체적인 단일화 방식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으나, 노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졌던 여론조사 방식 등을 막판 수용하면서 합의를 이뤘다.
결국, 2002년 11월 24일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승리한 노 전 대통령은 대선 전날 밤 정 대표의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유력 주자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민주당 이인제 후보 사이에서 단일화 논의가 오갔으나 워낙 이명박 전 대통령이 큰 격차로 앞서있던 상황이어서 성사되지는 못했다.
직전 대선인 2012년 18대 대선은 야권이 후보를 단일화했음에도 패배한 첫 사례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을 노출하다 11월 23일 안 후보가 전격 사퇴하는 형식으로 단일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의 후보 단일화와 달리 후보 간 합의 대신 한쪽의 포기로 이뤄진 당시 단일화는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첫 단일화 시도에 나선 범보수 진영으로서는 과거 야권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 삼아 내부 진통을 최소화한 '아름다운 단일화'를 이뤄야 해볼 만한 승부를 연출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