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 권유받고 1996년 정치인 변신
4선 의원 이어 당 대표·도지사까지
성완종 리스트 무죄 판결로 '기회'

7세 때 가세가 기울어 가족 모두 고향인 경남 창녕을 떠나 대구로 이사했는데 손수레에 세간을 싣고 이틀 동안 걸었다고 한다.
월세가 싼 곳으로 옮겨 다니느라 초등학생 때 5차례 전학했고, 도시락을 싸지 못해 수돗물로 허기를 달랜 때가 많았다. 장마에 낙동강이 범람, 강 옆에 일구던 땅콩밭과 집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고리 사채로 머리채가 잡혀 끌려다니던 어머니"를 봤다고 기억하는 장소는 지난 18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대구 서문시장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서민 대통령'이 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어려운 시절을 보낸 그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검사가 된 뒤 슬롯머신 사건을 맡으면서다. 당시 '6공화국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의원을 비롯해 고검장 등 검찰 간부들과 경찰청장, 병무청장까지 줄줄이 구속됐다. 조직폭력배도 등장한 이 사건은 드라마 '모래시계'로 제작돼 유명세를 날렸다.
당시 검찰 조직이 뿌리째 흔들렸고, 조직의 '이단아' 취급을 받던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지난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 '개혁공천' 사례로 정계에 들어왔다.
4선 의원을 거쳐 당 대표와 도지사를 지냈지만, 그는 늘 '변방'의 정치인이었다. 무엇보다 계파를 만들지 않았고, 특정 계파에 예속되려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친이(친이명박)도 친박(친박근혜)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계파 정치를 혐오한 측면도 있었지만, 계파에서도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계파가 없으니 혼자였고, 정치적 입지가 튼튼하지 못했다. '디도스 사태'와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의 책임론에 휩싸여 5개월 만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몫이 됐다.
성완종 리스트 의혹에 연루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을 때만 해도 "홍준표는 끝났다"는 게 정치권의 평가였다. 그는 "검사 시절 남을 처벌하며 저지른 업보"라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지난달 2심에서 무죄로 반전됐다. 자신의 무죄 판결과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 시기적으로 공교롭게 맞아떨어지면서 운명적으로 대선 후보가 됐다.
위기는 기회를 맞을 준비라고 했던가.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되고 서울구치소에 구속된 당일 오후 그는 한국당 후보로 선출됐다. 당원들이 소침해 있던 그때 그는 수락연설에서 "우리가 기대고 의지했던 담벼락은 무너졌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무너진 담벼락을 보고 한탄할 때 아니다"며 자신이 든든한 담벼락이 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당하면서도 거침없는 그는 그러나 막말 정치인의 대명사처럼 돼 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뇌물 먹고 자살한 사람"이라고 공세를 펴거나 당내 '친박계'(친박근혜)를 겨냥해 '양박'(양아치 박)으로 비유해 논란을 빚었다. 막말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게 대선 구도일 수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구도에서 '우파 스트롱맨'을 자처하고 나선 그가 어떤 강력한 지도력과 추진력을 보일지가 대선의 마지막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의종기자 je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