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前 대통령 만나 재야운동
참여정부 거쳐 18대 대선서 '고배'
대권 재도전 "국민의 촛불 될 것"

문 후보는 그의 자서전 '운명'에서 어린 시절의 가난에 대해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라고 회고했다. 가난을 통해 서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이 문 후보의 설명이다.
이후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경남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됐다. 이후 문 후보는 경남고교를 거쳐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대학생활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한 문 후보는 구속됐으며, 석방과 동시에 강제징집을 통해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되기에 이른다.
전역 이후 그가 마주한 현실은 암담한 그 자체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죽음을 맞은 그는 결국 장남으로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책임감으로 사법고시 도전을 결심한다. 이후에도 경희대 운동권 핵심으로 활동하던 문 후보는 1980년 극적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합격 통지를 받는다.
그는 차석의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판사 임용에서 탈락,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대형 로펌의 제의를 뿌리치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해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운명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각종 노동인권 사건을 총괄하며 재야운동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놨다.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한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을 "살아온 동안의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고 그의 저서 '운명'에서 밝힌 바 있다.
참여정부 시절 문 후보는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참여정부 출범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한 그는 "어느 정부든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며 "그 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차분한 성찰과 복기를 통해 오류와 한계는 겸허히 인정하고 성공과 좌절의 교훈을 얻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2007년 3월 비서실장에 오른 문 후보는 당시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참여정부와 함께 청와대를 떠난 문 후보는 경남 양산의 시골집으로 돌아와 일반인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그는 다시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과정에서 상주 문재인이 보여준 놀라운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에게 각인됨과 동시에 노 전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불의에서 오는 상실감이 그를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게 했다. 결국 문 후보는 지난 18대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득표율 48%로 아쉽게 좌절하고 만다.
대선 패배 이후 그는 깊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낸 끝에 다시 한 번 정권 교체를 내걸고 19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대세론을 등에 업고 경선압승을 거둔 그는 '두 번의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본선에서의 승리를 다짐하고 있다.
문 후보는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희생정신이 마침내 권력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정권교체·적폐청산의 뜨거운 여망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결국 정치의 몫"이라며 "기꺼이 국민의 촛불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