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유호명)
유호명 경동대학교 홍보센터장
4월 초순에도 속초에는 함박눈이 휘날린다. 창밖 아득하고 멀리 미시령에서 상봉·화암재·신선봉 이어 북으로 오르는 '흰 머리' 백두대간의 장엄한 마루금은 신비롭다. 다섯 달 넘게 흰 눈에 덮인 능선을 바라보면, 백두대간의 '백두'란 말이 과연 '백두산'에서 왔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강원도의 백두대간은 말 그대로 백두(白頭) 곧 '흰머리'이다. 그 눈부신 눈은 산자락과 바위에 쌓였다만, 떡시루의 쌀가루처럼 우뚝 선 소나무 잎 방석에도 켜켜이 앉았을 것이다.

성삼문은 절명할 때 '‥ 봉래산 제일 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이셔,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하였다. '금강산 가장 높은 봉에 큰 소나무로 서 있다 천지간에 눈발 가득할 제 홀로 푸르리라'는 변치 않을 절개와 결기를 내비친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낙락장송'이란 표현은 조선에서 지은 말 같다. 중국 고전에서 찾을 수 없고, 소나무도 북방 고구려 고토에서나 흔한 나무라는 점이 그러한 추측에 무게를 더한다. 게다가 '낙락(落落)'이란 표현은 겨울철 눈과 연관된 말이다.

낙락장송은 일향 성이라는 식물 본성을 비켜 '가지가 땅을 향해 늘어지고 떨어진(落)' 큰 소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와는 달리, 수평으로 팔 벌리거나 솟구친 어깻죽지에서 팔과 손만 아래로 늘어뜨린 모양이다. 그리고 이러한 '낙락'은 바로 찬 눈이 빚은 작품이다. 상하(常夏)의 땅에 선 소나무가 눈 맞을 일 없고, 온대의 활엽수도 낙엽 지면 그만이니 역시 눈 맞을 일 없다. 오직 소나무만 내리는 눈을 푸른 잎 떨기마다 넓적한 방석에 '떡살 앉히듯' 얹고 선다. 겨우내 이고 있는 솔잎 위 '눈 방석'은 얹힌 위에 다시 켜켜이 쌓여 그 두께와 무게를 더한다.

그 무게로 하늘 향해 벌린 팔과 겨드랑이를 조금씩 찢는다. 발레리나의 고통스러운 가랑이 찢기를 소나무는 해마다 거푸 꾸준히 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 이 저항하기 힘든 고통의 감내는 필연 낙락이란 겸손의 형용을 갖춰 내고, 그리하여 문득 고매하다는 칭송이 붙어 남 앞에 당당하다. 소나무의 가지 떨굼은 많은 세월과 불가피한 역경과 '부러질까 말까?' 간당간당하고 아슬아슬하며 싸늘했던 지난 역정의 드러남이다. 일도 가정도 관계도 품성도 결국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의 시련을 극복하기만 하면, 어느새 스스로 모르게 부쩍 성장한 마음과 몸을 남 앞에 드러낸다.

성삼문의 시조를 다시 읽자. '낙락장송 되야‥ 독야청청 하리라'는 글귀에서 사람들은 '청청'에 무게를 둔다. 그의 당한 상황에 비추어 '홀로 푸름'이 중요하기는 하다만, 그러나 한발 비켜 생각하면 '청청'은 타고난 바요 낙락은 단련이다. 청청은 아무튼 소나무라는 품종에 당연히 주어지는 본래의 바탕일 뿐이요, 낙락은 수십 년 꺾이지 않고 간난신고 감내해 얻은 고귀한 성취이다. 그렇기에 이 충신은 '낙락장송 되야'를 청청 앞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룰 수만 있다면, 그때에 청청은 그저 당연지사이거나 바탕일 뿐이다.

 

학생들에게서 하루 수십 번 '안녕하세요'를 듣는데, 얼굴에서 이 인사말이 한낱 클리셰(Cliche)만은 아님이 읽힌다. 대학 홍보센터장인 본인은 학생들에게서 우리 재래종 소나무의 낙락 하는 품성을 본다. 어려운 환경에 불구하고 우리 학생들이 수도권 유명 대학에 못지않은 취업률을 자랑함은 배움이나 삶에서 책상물림이 아니라 부지런히 움직여 최선을 다한 체득과 체화의 결과라 생각한다. 어떠한 내용이든 결국 형식에 담아내야 한다. 학생들의 '안녕하세요'가 따뜻함도 몸에 밴 습관 속에 어느덧 진심이 고인 것이리라. 낙락장송이 될 우리 학생들이 자랑스럽다.

/유호명 경동대학교 홍보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