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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에 위치한 고강동 선사유적공원 입구. /부흥고 제공

1995년 여름 큰 비에 반달돌칼등 우연히 드러나
21곳 집터 발견 한강주변 유적지중 규모 큰 편


부천시에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던 곳이 있습니다. 부천시의 북동쪽을 관통하는 경인고속도로 옆에 위치한 고강동 선사유적지랍니다. 지난 1995년 여름에 내린 큰 비에 청룡산의 비탈 흙이 씻겨나가면서 우연히 드러난 반달 돌칼, 돌창 등의 유물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이후 199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이곳이 한강변의 중요한 청동기시대 유적지임이 밝혀졌지요. 현재는 고강동 선사 유적 공원으로 조성돼 있답니다.

고강동 선사 유적지가 발견된 청룡산으로 올라가 볼까요? 청룡산은 정상이 해발 91.9m로 마을 뒷산 정도의 낮은 구릉이랍니다. 정상에 올라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청룡산 자락을 남북으로 두 동강 내며 뻗은 경인고속도로가 보입니다.

조금 더 멀리 바라볼까요? 수 천 년 전에는 없었던 김포 공항 활주로와 함께 김포 지역의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들녘이 한강을 끼고 있어 이곳이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알맞은 지형적 조건을 가진 곳임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인지 수 차례에 걸쳐 진행된 발굴 작업을 통해서 고속도로 북쪽 산자락에서 11곳, 남쪽 산자락에서 10곳, 모두 21 곳의 집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수 천 년 전의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청룡산 자락에 집을 짓고 마을 이루며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집터의 규모도 제법 커서 한강 주변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적지 중에는 손에 꼽힐 정도라고 합니다. 가장 넓은 13호 집터는 그 길이가 18.9m, 폭이 3.5m 정도라고 하니 신석기 시대의 움집보다 훨씬 커진 규모일 뿐만 아니라 한강변에서 발견되는 다른 청동기 시대 유적지의 집터에 비해서도 훨씬 큰 규모이지요.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요? 유적지에서 발견된 집터나 다양한 유물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집의 모양을 알아볼까요? 다행히 집터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땅을 파서 집을 지었기 때문이지요.

1호 집터의 경우 남북의 길이가 6.22m, 동서의 폭이 3.28m인데 그 바닥 가운데에서는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 2개, 가장자리에서는 작은 구멍들이 여러 개 발견되었답니다. 동서 양쪽의 깊이가 각각 50cm, 20cm가 되도록 산비탈에 'ㄴ'자로 땅을 팠던 것이지요.

그리 깊게 판 것은 아니었답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땅을 어느 정도 판 후 가장자리를 따라 벽을 세우고, 가운데 세운 기둥을 향해 지붕을 얹은 움집을 지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답니다.

21개의 집터에서는 가락 바퀴, 간석기(돌도끼·돌화살촉·돌창 등), 반달돌칼, 무늬 없는 토기, 그물 끝에 매다는 어망추 등이 발견되었답니다. 이 유물들을 통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며 사냥, 채집, 그물을 이용한 물고기 잡이, 그리고 농경을 하며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답니다.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들녘이 지금처럼 넓진 않았겠지만 한강이 멀지 않고 주변에 한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들이 있었음을 짐작해 본다면 이 산자락 아래의 평탄한 지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았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답니다. 특히 추수 도구로 사용한 반달 돌칼은 벼처럼 이삭이 있는 곡물을 재배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랍니다.

한편 청룡산 정상에서는 돌을 쌓아올려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추정되는 제단 유적지도 발견되었습니다. 다른 청동기 유적지에서 흔히 발견되지 않는 특별한 유적이지요. 모서리가 둥근 가로, 세로 각각 6m의 사각 형태로 가운데가 볼록하도록 돌을 쌓아 올렸답니다.

그 둘레에는 주변 지역과 구분 짓고 접근을 막기 위해서 파놓은 도랑도 발견되었답니다. 아마도 마을 최고의 권력자는 청룡산 정상에 지어진 이 제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며 자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과시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제사 지낼 때 쓴 것으로 판단되는 제기 모양의 토기와 그 바닥에서는 불에 탄 흙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이 제사를 지냈던 장소였음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지요.

아직까지 고강동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할 박물관이 마련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인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산자락에 있었을 많은 유적지들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룡산 정상에 서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가며 주변을 바라본다면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삶의 조각들을 조금이나마 맞춰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효중 부흥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