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300만 경기 도백에 생뚱맞은 분풀이
어물쩍 덮고 뭉갤 일이 아니라 사과해야
성난 사람들이 특정인을 향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 이어졌다. 궁지에 몰린 당사자는 애써 태연했지만 난처하고 딱해 보였다. 그는 군중을 달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역부족이다. 쫓겨나듯 현장을 벗어났다.
성난 군중에 둘러싸인 건 남경필 경기도지사였다. 올 3월 초 자신이 지은 책의 출판기념회를 하려 대구의 한 대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다.
미리 와 있던 사내들은 남 지사를 가로막고 험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대구에는 뭐하러 왔노, 돌아가라"던 한 남성은 "넌 욕 먹어도 싸다"면서 저속한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수행원 몇이 제지하려 했으나 그 남자와 친위대는 막무가내였다. 남 지사는 "계속 말씀하시라, 더 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웬 여성이 끼어들어 "지금 비꼬느냐"면서 욕설과 함께 "이 땅을 떠나라"고 했다. 그 사내가 다시 "니는 대통령 될 자격이 없는 ×이다, 대구에 얼굴도 디밀지 마라, ××야"라고 소리쳤다.
3분12초짜리 영상 대부분은 남 지사를 향한 욕설과 비방으로 가득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실린 고성과 외침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현장에 모인 태극기 대원들은 남 지사에게 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방하느냐고 비판했다. "세월호가 왜 대통령 탄핵사유가 되느냐"면서 남 지사를 배신자로 몰아세웠다.
남 지사가 봉변을 당한 때는 박 전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정점을 찍었던 시점이다.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경북에서는 '잘못은 했지만 탄핵할 정도는 아니다'는 게 바닥 정서였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과 동정심은 그를 비판하고 새누리당을 뛰쳐나간 정치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이 와중에 바른정당을 창당한 남 지사가 호랑이굴에 들어온 것이다.
대구·경북, 이른바 TK의 상실감, 무력감, 배신감은 예견됐던 일이다. 그렇더라도 남 지사에 대한 폭력은 도를 지나쳤고, 야만스런 언행이었다. TK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경기도지사를 욕보이는가. 동영상을 보면서 솟구쳐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경기도민은 경북지사나 대구시장에게 이런 패악질을 한 적이 없다. 다른 지역 광역단체장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어떤 정치인에도 마찬가지다. TK는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과 단체장에게도 이런 지독한 욕설을 했는지 묻고 싶다. 대구 출신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에게도 이러했는가. TK가 그에게 이런 모욕을 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TK는 경기도 수장(首將)을 욕보일 자격이 없다. 남 지사는 경상도가 함부로 대할 만큼 잘못한 게 없다. 새 정치, 바른 정치하자고 외쳤을 뿐이다. 사회통합 부지사를 통해 협치와 연정이라는 새 모델을 보여줬다.
TK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지지로 국정을 파탄 나게 한 공범들이다. 지정학상 변두리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늘 중심에 섰던 기득권 세력이다. 탄핵 사태와 관련, 어떤 이유로도 남 지사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1천300만명 경기도민의 수장에 대한 분풀이는 적반하장이고, 생뚱맞은 난동이다.
남 지사는 출판회 자리에서 "욕을 먹는 게 정치인의 역할이다"고 했다. 관용(寬容)의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경기 도백(道伯)에 대한 무례와 행패를 그냥 넘겨선 안 된다. 경기도민의 명예와 자존에 TK의 비수(匕首)가 꽂혀 있다. 어물쩍 덮고 뭉갤 일이 아니다. TK 무리는 남 지사와 경기도민에 사과해야 한다. 관용은 그 다음이다.
/홍정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