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비정규직 말 귀 기울이는
우리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길…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게는 한 인간의 깊이 역시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인가. 그중 하나로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답을 말할 것이다. 이 대답 역시 진부하게 들린다. 그러나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커녕 날마다 새롭다. 세상에 진부한 고통이란 없으니 저 대답도 진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투표할 것이다. 깊은 사람에게, 즉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에게 말이다. 국민과 함께 슬퍼할 줄 몰랐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면서 그런 각오를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선 후보들이 낸 책을 읽었다. 나는 그들이 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폈다. 청년 시절의 그들은 누구 하나 못난 사람이 없었다. 모두 수재였고 좋은 대학에 갔으며 탄탄대로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대로를 곧장 걸어갔고 어떤 이들은 엉뚱한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수십 년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 음식점에서 메뉴를 고르는 일 따위가 아닌 것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 앞에서 대다수는 자신에게 편안한 길을 택하며 그것은 비난받을 일이 못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도 고통이 더 많은 쪽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은 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 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대통령이 부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혹자는 성품이 아니라 능력을 봐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성품이냐 능력이냐'라는 물음은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실무적 능력이야 해당 분야 실무자의 덕목이면 될 일이다.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구세주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이 오늘의 그를 믿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과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귀 기울일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말을, 반값 임금에 혹사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을, 차별 당하는 소수자들의 말을 말이다. 그 고통을 알겠어서, 차마 도망칠 수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좋겠다.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