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간접선거로 초대 당선 이승만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
윤보선 이후 박정희·전두환 군부거쳐… '피' 아닌 '표'로 주권수호
민주주의는 선거로서 완성된다고들 말한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이념은 우리나라 헌법의 토대다. 우리나라는 1948년 7월 20일 제헌헌법에 따라 간접선거로 선출한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이승만)부터 18대 박근혜 대통령까지 모두 18번의 선거를 통해 11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다.
엄격히 따지면 19번의 선거와 11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제4대 대선이었던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직후 국회에서 무효처리되면서 공식선거로는 인정받지 못하게 됐다. 이제 제19대, 12번째 대통령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의 말처럼 1948년 첫 대선 이후 지난 69년간 우리 국민들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거리에 뿌려야 했다.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 선거는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에 따라 그해 7월 20일 국회 간접선거로 치러졌다. 제헌헌법은 대통령 선거의 국회 간선제, 1차 중임, 임기 4년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당시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 참석, 무기명 비밀 투표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후보자별 득표를 보면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가 1표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헌법을 개정해 간접선거를 직접선거로 바꿨고, 2·3대 대선에서 모두 승리했다. 대한민국 선거 역사에 있어 두고두고 기록될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단어가 바로 3대 대선 준비단계에서 나온다.
1954년 9월 6일 집권당이던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연임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표결 결과 부결로 나오자, 영점 이하 숫자는 버린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고 1956년 5월 15일 3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70%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이후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4대 대선에서 이승만이 88.7%의 지지율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으로 하야했다. 당시 국회는 4대 대선을 무효라고 결의했고, 이에 따라 1960년 8월 12일 두 번째 4대 대선이 국회에서 치러졌다. 선거결과 윤보선 후보가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후 박정희·전두환 군부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5~9대 대통령을 지내며 종신 집권의 야욕을 드러냈지만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이 됐고,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로 대표되는 대통령선거인단 제도 등을 만들어 12대 대선에서도 당선됐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수많은 피가 뿌려지며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른 민주 항쟁으로 되찾은 대통령 선거 직선제로 1987년 제13대 대선이 치러졌다. 하지만 야권 분열로 36.6%의 득표율을 얻은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에 피 대신 표를 뿌려라' 작가 김은식은 최근 펴낸 '대선의 현대사'에서 선거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선거, 민주주의의 가치를 '피'가 아니라 '투표'로서 지켜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김명호·이현준기자 boq7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