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 수원중심 사통팔달 교통로 역할
日강점기·한국전쟁 견디고 시민 쉼터로
전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인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조상들의 산에 대한 믿음은 특별납니다. 고조선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桓雄)도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백두산)으로 내려오고, 단군왕검도 나중에는 산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만년 오랜 역사 속에서 적들이 쳐들어와도 평지에서 싸우지 않고 산성으로 피신해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싸웠습니다. 심지어 국가의 흥망성쇠나 가문의 번창까지도 산에 의지했습니다.
이른바 풍수지리(風水地理) 사상 말입니다.
이에 따르면 크든 작든 마을마다 믿고 의지하는 진산(鎭山)이 있었습니다. 혈장(穴場)이 있는 명당(明堂) 뒤에 위치하기 때문에 후산(後山)이라고도 하지요.
진산은 한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그 고을을 진호(鎭護:난리를 평정하여 나라를 지킴)하는 주산(主山)으로 개성의 송악산, 서울의 북한산이 대표적입니다. 아마도 수원은 광교산이 되겠지요.
그런데 수원에는 도심 한가운데에 그리 높지는 않지만 도시의 중심을 잡아주는 산이 있으니 바로 '팔달산(八達山)'입니다. 서울의 남산처럼 말입니다. 둘레 5.7㎞의 화성(華城) 성곽 중에 1.2㎞가 팔달산에 걸쳐있습니다.
화성행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이 산은 처음에는 탑(塔)처럼 생겨서 탑산이라 했고, 이후 팔탄산(八呑山)으로 불리다가 18세기 말부터 팔달산으로 불렀습니다. 높이는 128m의 낮은 구릉으로 남북이 1.2㎞, 동서로는 약 800m 크기입니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1622∼1673)이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산 주변을 보고 큰 도시가 들어설 만하다고 했다지만, 그때는 팔달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냥 '북평(北坪, 북쪽의 넓은 뜰)'이라고 했답니다.
아마도 1796년 화성행궁이 완성된 이후 신도시 수원의 중심으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의 이름값에 맞게 우리나라 교통로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미루어 보건대 화성을 쌓기 전의 팔달산은 돌산이었을 겁니다. 이 팔달산의 돌을 1만3천900덩어리 캐서 성곽을 쌓았다고 화성축성 보고서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거든요. 전체 축성에 사용된 돌의 약 7% 정도입니다. 이러한 팔달산에는 시대마다 많은 흔적을 남깁니다.
아마도 화성과 화성행궁이 제대로 지켜질 때에는 함부로 팔달산을 훼손하지 못했겠지요. '금산(禁山)'으로 불렀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정조 임금의 흔적이 서린 산이라도 감시와 관리의 행정력이 흐트러진 혼란의 시대에는 일부 성곽이 여기저기 무너지는 것처럼 팔달산의 제 모습은 지켜지기 어려웠지요.
먼저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1917년 10월 29일)에 남쪽 산기슭에 수원신사(水原神社)가 세워졌었고, 산 여기저기에 여러 개의 일본 사찰이 세워졌으며, '근대화된 공원'이 되면서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해방 이후에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3·1운동 기념탑, 8·15 독립기념탑, 홍난파의 고향의 봄 노래비, 강감찬 장군 동상 등이 세워졌고,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자동차도로까지 만들어집니다.
또 삶이 절박했던 6·25전쟁 직후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됩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었던 수원의 인구였지만 혼란의 시대에는 화성 성곽의 목재들과 함께 팔달산 나무들이 가난한 민초들의 난방 에너지원이었겠지요.
그러나 1976년대 화성 복원 공사가 어느 정도 이뤄져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2003년 화성행궁이 완전 복원된 이후에는 수원 시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화성을 지키면서,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쉬게 해주는 고마운 산입니다.
/김찬수 동원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