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산 정상의 행주대첩비
덕양산 정상의 행주대첩비 /부흥고 제공

明 벽제관 전투 대패로 조선군 '나홀로 항전'
민초들의 끈질긴 저항… 행주대첩비로 기려


425년 전 한강 북쪽에 접해있는 역사 현장으로 찾아갑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열 달이 지난 1593년 3월, 조선의 관군이 왜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던 격전지랍니다. 고양시 덕양산 봉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행주산성이지요.

이곳이 바로 권율 장군의 지휘를 받은 2천300여 명의 조선군이 3만 여 명의 왜군을 격퇴한 행주대첩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행주산성을 오르다보면 삼국시대에 지은 토성의 흔적이 산 둘레에 남아있고 남쪽으로는 한강으로 깎아지르는 절벽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로 활용해왔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답니다.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었던 1593년 3월 14일, 조선군과 왜군 사이의 전투인 행주대첩은 어떻게 일어났던 것일까요?

행주대첩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부터 알아볼까요.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북상했던 왜군은 1593년 2월 9일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패한 후 밀리고 밀려 한양과 경기도 일대까지 퇴각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행주대첩 발생 약 보름 전인 2월 27일, 왜군의 사기가 오르도록 한 사건 하나가 발생했답니다.

거침없이 뒤쫓아 남쪽으로 내려오던 명나라 군대를 행주산성으로부터 북쪽으로 10여km 떨어져있는 벽제관 부근 전투에서 막아냈던 것이지요. 방심하고 있던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 부근의 숯돌 고개에서 매복하고 있던 왜군에게 기습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전투 이후 명나라 군대는 남진 계획을 접고 평양성으로 후퇴하고 말았지요. 한편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던 권율 장군의 군대도 승승장구해 한양을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권율 장군은 1592년 8월, 전라도 전주를 점령해 곡창 지대인 호남 지역으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왜군을 충청도 금산의 이치에서 크게 물리쳤답니다. 이어서 1593년 1월에는'세마대 전설'(2017년 1월 3일자 경인신공)의 재치를 발휘해 왜군으로부터 수원의 독산성까지 지켜낸 후 한양 수복을 꿈꾸며 행주산성으로 올라와 진을 치고 있던 상황이었지요.

이렇게 왜군을 상대로 이긴 경험을 바탕으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아군과 협공해 한양을 되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 이후 권율 장군의 부대는 명나라 군대와의 연합 없이 홀로 왜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권율의 부대는 한강을 등진 배수의 진을 치고서 산성 주변에 설치한 목책과 화력을 보강하며 왜군의 선제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예상대로였습니다. 왜군은 명나라 군대와 조선군의 연합을 차단하기 위해 벽제관 전투 이후 3만 여명의 군사를 동원해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을 공격해 왔습니다. 3진으로 편성된 왜군은 하루 종일 지속적으로 공격해옴으로써 조선군의 방어선을 뚫으려 했지요.

그 때마다 성내의 조선군은 화차와 신기전, 여러 신식 화포 등의 무기를 활용해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답니다. 1천 여 명 남짓한 승군도 결사적으로 항전하며 왜군을 막는데 힘을 보탰지요. 하지만 무기는 거의 소진돼 갔고 결국 높이가 비교적 낮았던 산성의 서북쪽의 성벽이 방어선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내에 있던 조선군은 백병전을 치르면서 성내의 백성들과 함께 끈질기게 저항해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행주대첩의 승리는 이후 왜군으로 하여금 한양에서도 퇴각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덕양산 정상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2년과 1970년에 각각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습니다. 그 비석들은 진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지요.

행주대첩비를 등지고 서서 서울 방향으로 펼쳐진 들판과 당시의 조선군이 배수의 진을 쳤던 한강을 바라보노라면 425년 전 치열했던 전투 전후의 상황과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결연한 마음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효중 부흥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