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형제 간 사이좋게 분할
2011년 삼양홀딩스로 상호 변경

국내외로 사업이 다각화 되면서 모기업인 삼양사는 2011년 11월에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주)삼양홀딩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2015년 12월 현재 삼양홀딩스의 대주주로는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5.4%), 국민연금관리공당(13.19%), 양영재단(5.22%) 등이다. 김윤 회장은 창업자 김연수의 3남인 김상홍(2010년 타계)의 장남이다. 삼양그룹도 창업3세 경영시대를 맞은 것이다.
한편, 경성방직은 해방 이후 남북분단으로 북한지역에 있는 조면공장을 잃었다. 그 결과 영등포, 의정부, 양평동, 쌍림동 공장만 거느려 규모가 상당히 축소됐다. 게다가 6·25전란 중 포격으로 의정부공장과 시흥염색공장이 완전히 파괴됐다.
영등포공장도 전란의 피해를 입었는데, 방적공장이 전소되면서 방기 3만200추 중 2만5천600추가 소실되고 직기 1천129대 중 12대가 망가졌다. 하지만 서울 탈환 직후인 1951년 4월부터 생산을 재개하고 1953년에는 방기 1만2천600추와 직기 448대 규모로 확장됐다.
당시 가장 어려운 것은 원면의 확보였다. 원조면이 남아돌아도 방직협회에서는 경성방직에 원면을 배정해주지 않았는데, 자유당 정부가 야당계 기업으로 지목해 배척했던 탓이다. 김용완 사장이 무쵸 주한미국대사에 호소해서 원면을 겨우 배정받을 수 있었다. 1959년 경성방직의 시설은 정방기 4만600추, 직기 1천68대로 전쟁 이전 수준으로 복귀했다.
한편, 1956년 국내에 처음으로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됐다. 경성방직은 그해 3월 3일 주식시장 오픈과 함께 증권거래소에 상장해서 기업을 공개하고 자본금을 1억환으로 늘렸다. 증시 개장 당시 총 12개 종목이 상장됐는데 경성방직은 그 가운데 회원번호 001번을 받았다.
주목되는 것은 경성방직 설립직후인 1922년 4월부터 선장 노릇을 하던 김연수가 경성방직의 소유 및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이다. 김연수는 1945년 12월에 경성방직 대표취체역에서 물러난 후 1958년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경성방직의 주식(총주식수의 30%)을 전량 처분했다.
이후부터 김연수는 오로지 삼양그룹 형성에 매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경성방직은 매제인 김용완이 경영을 전담했다.
김용완은 '기업의 미래는 인재에 달려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업가였다. 1939년 만주에 남만주방적 설립과 함께 회사 내에 중등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만들어 근로자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산업체 부설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창업자 김성수는 훨씬 이른 시기에 경성방직을 떠났다.
1928년 경성방직의 취체역을 사임하면서 기업가로서의 활동을 접었던 것이다. 사회계몽운동 내지는 교육활동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김성수가(家)는 고려중앙학원(고려대, 중앙중고)과 동아일보를, 김연수가는 삼양그룹을, 김용완가는 경성방직을 분할 지배하는 식으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경성방직이란 싹을 틔어 잘 배양해서 창업자 형제간 사이좋게 나눈 것이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