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세한 내용 비문 쉽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삼국시대 영토 다툼 경기도 미발견 비석 많을듯
또 다른 '진흥왕 순수비'를 찾습니다.
역사는 '기록'과 '유물·유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기록과 유물·유적입니다. 문자가 없었던 선사시대 연구에는 유물·유적이 전부지만, 문자가 사용되는 청동기 시대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기록입니다. 기록은 대부분이 책(冊)의 모양으로 된 문서, 서적입니다.
그런데 종이로 돼있는 대부분의 책은 시간이 흐르면서 훼손돼 사라집니다. 다행히도 기록 중에는 다른 형태의 것이 있어요. 바로 돌이나 쇠붙이 등에 있는 기록인데 돌에 기록해 놓은 비석(碑石)이 가장 많습니다.
비석에는 무덤에 세워서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능비(陵碑)나 묘비(墓碑), 영토를 개척하고 세운 척경비(拓境碑)나 순수비(巡狩碑), 국가 정책을 알리려 세운 척화비(斥和碑), 인물의 은혜를 기리는 송덕비(頌德碑), 국가간의 영토 경계를 기록한 정계비(定界碑) 등 종류가 다양합니다.
이들 다양한 비석은 시대에 따라, 세운 목적에 따라, 세울 당시의 상황에 따라 크기나 모양을 달리하고, 적는 방법도 다양하기에 각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세세하게 연구하고 새로운 비석을 찾고 있답니다. 옛 비문을 연구하는 학문을 '금석학(金石學)'이라고 합니다.
문자가 없었던 선사시대에는 그림으로 기록을 남기기도 했어요. 바위그림이라고 하는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국보 제285호), 울산 천전리 바위그림(국보 제147호)이 대표적입니다. 뭔가를 하늘에 기원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사냥의 대상이었던 육지와 바다 동물을 다양하게 새겼습니다.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받아들인 후에는 많은 내용을 세세하게 비문에 적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돌을 완전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국가에서 왕이 직접 세운 비석이지만 삼국시대에는 완벽한 형태로 곱게 다듬지 않고 만들었습니다.
글씨도 크기나 서체가 명필가의 서체와도 거리가 멉니다.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막 쓴 글씨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예스러운 글씨를 '고졸(古拙)하다'고 표현합니다.
비문 내용은 치열한 삼국간의 영토 다툼에서 이 땅은 언제 누가 점령했다는 내용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중에서 신라의 비가 가장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영토 확장을 가장 왕성하게 꾀하던 진흥왕 때 여러 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충북 단양에서 발견된 적성비(국보 제198호)와 현재까지 4개가 발견된 순수비가 대표적입니다. 북한산비(555년 건립 추정), 창녕비(561년), 황초령비(568년), 마운령비(568년)는 진흥왕이 직접 영토를 확장하고 두루 살피며 돌아다닌 후 세운 비입니다.
그런데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 당시 가장 치열하게 영토 경쟁을 하던 곳이므로 현재 발견된 비보다도 더 많이 세웠을 겁니다. 아직 발견이 안됐을 뿐입니다. 경기도 북부의 감악산 비석(마모가 심해 12~13자 정도 글자 흔적만 확인)이나 강원도 철원 고석정비(비석을 세워졌던 흔적만 확인)도 진흥왕 순수비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답니다.
주로 주위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산꼭대기(높이 500∼700m)나 교통의 중요 지점, 군사적인 요충지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옮겨지거나 훼손되고 파괴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돌에 새겨놓은 비석은 쉽게 마모되지 않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기 때문에 지금도 어디엔가 있습니다. 오다가다 마을 입구나 덜 알려진 유적지 등에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역사적인 발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김찬수 동원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