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몽양 여운형의 생가
복원된 몽양 여운형의 생가. /부흥고 제공

日강점기 한중 오가며 독립운동 앞장
해방후 단일정부 추진하다 총탄 맞아
정치 논쟁 탓 60여년 지나서야 재평가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줄기가 비로소 만나는 곳, 양평군 두물머리를 목전에 둔 남한강변에 우리나라 현대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시골 마을이 있습니다. 경의중앙선 신원역 철길 근처의 묘골이라는 곳이지요. 그곳에는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태어나서 자란 생가 터와 몽양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은 특이하게도 복원된 여운형의 생가 지하에 지어져 있고 관람 순서는 기념관을 먼저 돌아본 후 생가로 올라가도록 안내돼 있습니다.

기념관 안은 그리 넓은 전시 공간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1886년 출생 이후의 성장 과정, 민족을 위한 여러 활동, 안타까운 죽음을 소개한 전시물은 62년의 삶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전시장에 소개된 여운형의 일생을 돌아볼까요? 서울 배재학당에서 근대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인 1907년에 생가에 광동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고 전국적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을 고향 마을에서도 추진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노비문서를 불태워 집안의 모든 노비들을 해방시킴으로써 평등한 세상에 대한 바람을 실천으로 보여주기도 했었지요.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은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 본격화됐습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상하이에 있던 그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으며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답니다.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폐간되고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었지요.

전시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피묻은 남자의 겉옷 상의가 전시돼있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1947년 7월 19일에 한 청년이 쏜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날 때 입고 있었던 옷입니다. 총탄이 관통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날의 처참함을 느끼도록 해준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당시 외국에 머물렀던 김구, 이승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여운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광복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38선 남쪽과 북쪽에 주둔한 상황에서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 장관들은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 정부 수립 문제를 두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회의 결과가 우리나라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답니다. 소식에 포함된 '신탁통치'라는 말 때문이었지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모스크바 회의에서 결정된 절차를 거쳐 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해야 한다며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우익 계열은 신탁통치 반대를, 좌익 계열은 모스크바 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를 주장했습니다. 이후 회의의 결정대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결렬됐고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고 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지요.

여운형은 통일정부 수립에 위기가 닥쳤다고 판단하고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답니다. 남한에서 좌우합작을 성사시킨 후에 북한과의 연합을 통해 통일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좌우합작을 반대하던 정적들로부터 수차례 테러를 당했고 결국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념관에는 피 묻은 겉옷 상의와 함께 장례식 때 사용한 만장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여운형이 그렇게 바라던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거행될 장례식에 사용될 것이라는 해설사의 설명에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답니다.

그가 독립 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것은 2008년, 몽양기념관이 문을 연 것은 2011년입니다. 여운형이 서거한 지 올해로 70년이나 됐지만 그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평가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랍니다.

입장이 서로 다른 정치적 논쟁 속에서, 제대로 평가돼야 할 인물과 역사들을 의도적으로 감춰둘 수밖에 없었던 우리 현대사의 안타까운 단면이지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변의 몽양기념관에서 70년 전 여운형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김효중 부흥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