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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정치적 배경위에 놓인
박인환의 시편은 어둡고 무거워
'…1951년의 서적/…'에서 보듯
서적은 우리민족 불멸의 정신
전율은 이땅의 평화와 자유 상징
그의 염원은 오늘 우리들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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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박인환(1926~1956)의 어린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챙챙하고 바람이 청량했을 것이다. 땀이 나도록 인제공립보통학교 운동장을 뛰놀다 내린천으로 내달아 달아오른 몸을 식혔을 거고 설악산 기슭을 더듬어 올라 산꿩알을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박인환에게 11세 때 떠난 고향 인제는 6·25 전란을 겪은 황폐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지금은 내 고향.//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피 묻은 전신주 위에/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세상에 없다.//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거기 나는 동상처럼 서 있다.'고 노래한 고향의 생가터에 그의 반신 동상이 서 있다.

생가터에 세워진 박인환문학관은 그가 명동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누비고 다니던 선술집 '유명옥' 고전음악을 들려주던 '봉선화다방' 서울 수복 후 가장 먼저 문을 열었던 '모나리자다방' 문인과 연극인, 영화인과 음악인들의 아지트였던 '동방살롱' 그의 단골 술집이었던 위스키 시음장 '포엠' 등을 그 시절의 분위기로 재현해 놓았다. 그런데 정작 시인 박인환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문학세계를 체계 있게 펼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박인환은 그의 시세계를 평가받지 못한 불운한 시인이다. 그 불운이 친구인 K 시인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 이상의 기일을 맞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술집 '왕관'에 모인 당대의 모더니스트들은 자리를 옮겨 가며 술로 밤을 지샜다. 며칠째 계속된 폭음 후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1956년 3월 20일 밤 9시경의 일이었다.

그의 장례식에 K는 오지 않았다. 그 후 그는 '박인환'이라는 산문에서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장례식에 일부러 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목마와 숙녀'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죽음을 기린 추모시고 그녀에게 바치는 박인환의 레퀴엠이다. 목마는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의 시신을 싣고 떠난 목관을,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를 상징하고 있음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목마'와 '숙녀'를 낡은 시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낡았다'라는 말은 K의 등단작 '묘정의 노래'를 읽고 박인환이 K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고 울먹이는 박인환의 모습이 선연하다.

박인환의 시편들은 결코 가벼운 것만도 낭만적인 것만도 서구적인 것만도 아니다. 진보적이지만 그는 한국군 종군기자로 전선을 누비면서 수많은 젊은 죽음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박인환 시편의 배경에서 전쟁과 정치를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전쟁과 정치적인 배경 위에 놓인 그의 시편들은 실존적이며 어둡고 무겁다. 그 어둡고 무거운 시상들을 은유라는 시적 기교로 풀어놓아 덜 어둡고 덜 무거운 시편으로 읽히는 것이다. '……1951년의 서적/나는 피로한 몸으로 백설을 밟고 가면서/이 암흑의 세대를 휩쓰는/또 하나의 전율이/어데 있는가를 탐지하였다./오래도록 인간의 힘으로 인간인 때문에/위기에 봉착된 인간의 최후를/공산주의의 심연에서 구출하고자/현대의 이방인 자유의 용사는/세계의 한촌인 한국에서 죽는다……'에서 보는 것처럼 서적은 우리 민족 불멸의 정신이고 지혜이며 전율은 이 땅의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박인환의 염원은 오늘 우리들의 염원이다.

올해는 6·25전쟁, 67년이 되는 해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영령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