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윤이상은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더 유명한 뮤지션이다. 그런데 사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상당수가 난해한 편이다. 어떤 것은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배경음악처럼 기괴하기까지 하고 오죽하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를 거부하기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악기에 노장사상과 불교적인 요소를 도입한 그의 곡은 세계 유수의 음악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는 10여년간 베를린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윤이상은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가졌을 당시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그 용이 상처를 입었으며, 산 위의 구름 속으로 날긴 했지만 하늘까지 높이 차고 오르지는 못했다고 했다. 윤이상이 태어난 해에는 공교롭게도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나 시인 윤동주(1917~1945)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이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특히 박정희와 윤이상은 너무나도 악연(惡緣)이었다.
일본 오사카 음대 재학 시절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억압받는 현장을 보고 사회·정치적 의식을 갖게 된 윤이상은 1944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간 친구도 만나고 평소에 좋아하던 '강서고분도'를 보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혐의가 씌워져 무기징역형으로 수감된뒤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른바 동백림(東伯林)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성을 인정한 200여 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내 그는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윤이상의 작품에 대한 연주 금지는 물론 입국금지까지 내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마치 어머니의 태몽처럼 '상처 입은 용'으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시대와의 불화 때문에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외국에서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야기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최근 다양한 형태의 음악회와 연극으로 제작돼 전국에서 선보이고 있으니 한 번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김선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