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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일대는 물론이고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인천의 역사 상기되도록
지금이라도 남아있는 장소들
어떻게 잘 지켜나갈지
고민이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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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문화평론가
"여기는 일제 시대에 지어진 미곡 창고를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리모델링한 곳이에요."

창 밖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이 길게 이어진다. 근대건축물들이 밀집한 인천 중구의 '개항장 역사문화지구'에는 사시사철 학생들부터 공무원까지 다양한 사람이 찾아온다. 2009년 처음 인천아트플랫폼이 개관할 무렵에는 밤에 돌아다니기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커피 한 잔 마실 곳도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골목 구석구석 개성있는 가게들이 많아지고 커피 마실 곳은 너무 많아져서 고민일 정도로 탈바꿈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주유소, 맥도날드, 24시간 편의점 등 획일적으로 디자인된 유용하지만 무의미한 공간을 '장소'가 아닌 장소를 뜻하는 '비(非) 장소'라고 구분한 바 있다. 장소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비장소는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키는 생존과 일상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 중구 일대의 거리와 골목들은 '비(非)장소' 대신 '장소'가 많이 남아있는 보기 드문 곳이다. 갯벌을 메워 만든 빌딩숲 송도 신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의 흔적, 공간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와의 대면이 가능한 지역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정수복은 "오로지 필요에 의해 생긴 기능적 '비장소'들만 즐비한 공간에서 살다 보면, 삶이 삭막해지고 각박해지고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며 쫓기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중구야말로 인천에서 가장 느긋한 호흡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가득한 지역이다. 찜통 같은 여름, 빽빽이 모여 더운 바람을 내뿜고 있는 고층 건물의 에어컨 실외기들을 피해 지나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중구의 '장소'성은 돋보인다. 다만 중구의 행정 시스템이 중구의 이 '장소'성을 십분 활용하기는커녕 '장소'를 '비장소'로 바꾸기에 바쁘다는 점이 새삼 안타까울 따름이다.

중구 송월동 비누공장 건물 철거 이후 근대건축물 전수조사를 추진한다는 인천시의 발표를 보면서 떠오른 도시가 바로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였다. 고대 로마 시대의 길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곳은 반질반질 윤기나는 골목길과 광장만으로도 매력 만점인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다. 심지어 골목길마저 관광 요소로 활용한다. '나를 지나가게 해주세요(LASCIA MI PASSARE Street)'라는 이름의 골목길은 한 사람이 지나가면 딱 알맞을 정도로 좁다. 예전부터 여성들이 남성에게 작업을 거는 주요 장소였고 지금도 짝을 찾는 스플리트의 남녀들이 애용 중이란다. 그러니까 스플리트 사람들에게 이 골목은 관광지이기에 앞서 그들이 아는 누군가의 연애와 사랑 이야기로 꽉 차 있는 '장소' 중의 '장소'인 셈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는 많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면서 현재와 호흡하는 도시는 이곳뿐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던 로컬 가이드의 자랑이 허풍으로 들리지 않았다. 모름지기 공간은 누군가가 살면서 온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쉽게 망가지거나 무너지기 마련이다. "오래되고 역사적 가치가 있으니 아무것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식의 완고함만으로는 오히려 아무것도 보존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스플리트는 건물에 소화전을 달고 창문도 살짝 내는 식으로 변형을 주되, 원형을 최대한 잘 보존하는 쪽을 택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도시'라고 요란하게 홍보할 필요 없이 잠깐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도시에 쌓인 시간의 깊이와 무게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도시 곳곳의 '장소'들이 관광객들을 얼마나 많이 불러모으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수복의 지적대로 "기억은 철저하게 장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장소는 이런 의미에서 기억이 사는 집"이다. 인천은 '기억이 사는 집'을 많이 갖고 있는 도시다. 개항장 일대는 물론이고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인천의 기억들이 제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남아있는 '장소'들을 어떻게 잘 지켜나갈지 고민이 필요한 때다. 기억은 저절로, 혼자서, 아무 곳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