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말, 항간에 떠도는 말
책줄이나 읽었다는 사람들이
멋대로 뱉는 말속에도 진실 있고
세상에 대한 판단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정부는 미래가 없다
어느 시대나 유념해야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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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현대문학 전공자이건만 어쩌다 보니 '연산군일기'를 접하게 됐다. 그 시초인즉슨, '서울문학기행'이라는 졸저를 쓰다가 옛날 이광수 홍지동 산장 근처에 탕춘대성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탕춘대성이라는 것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때 그 탕춘대성이란 근처에 탕춘대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탕춘대 또는 탕춘정은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 12년 정월에 완성을 본 정자로서, '연산군 일기' 61권, 연산 12년 3월 7일자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썼다.

"정자는 장의사(藏義寺) 서편 기슭 우뚝 솟은 꼭대기에 있는데 청유리와 기와로 이었으며, 위아래의 횡각이 냇물을 수백 보나 걸터 타고 있는데, 모두 청유리 기와로 이고 내를 막아서 저수하였다. 산 안팎에서는 다 두견화를 심고 그 정자 이름을 탕춘정(蕩春亭)이라 하였다. 왕이 자주 거둥하였는데, 왕비 이하도 모두 말을 타고 따랐다. 이 때문에… 항상 말을 수천 필씩 길렀다."

연산 12년은 연산군의 재위 마지막 해였다. 그 정자 이름이 봄을 탕진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짓고 이제부터 한판 진짜로 즐겨보겠다 했건만 사실은 그해가 그의 마지막 해였던 것이다. 그는 중종반정(1506)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탕춘정을 지은 그의 뜻이 무색하게도 그는 정자를 지은 해에 세속의 영화를 잃고 인생마저 마감했던 것이다.

연산 12년 기록을 보다,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탐구욕이 어쩔 수 없이 일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 연산군 재위 첫해의 기록부터 찾아보게 된다.

선왕이 세상을 떠나고 새 왕이 뒤를 잇자마자 신하들의 항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요샛말로 하면 '군기잡기'인지도 모르겠는데, 이유인즉슨 새 왕이 세상 떠난 아비를 위하여 불교식 재를 지내려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것이 사단이 되어 해가 바뀌어 정월이 다 가도록 대신들, 간원들, 선비들이 난리가 났다. 어찌하여 유교 섬기는 나라의 제왕이 선왕의 뜻을 거스르고 왕조의 법통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불교에 기우냐 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이 있었는데, 그 말이 꽤나 극언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드디어 왕이 참지 못하고 죄를 주려 하자 이번에는 또 그것을 가지고 난리들이 났다. 그들은 유생의 극언 담긴 상소를 가리켜 '광망(狂妄)'이라 일컬으면서도 그것을 빌미로 죄를 주면 안 된다고들 했다. 그 중의 한 논리는 이와 같다.

"유생의 말이 비록 광망하고 경솔한 듯하오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말이 격절(激切)하지 못하면 임금이 귀를 기울이게 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말을 격절하게 하고자 하여서 그런 것이요, 그 뜻으로 말하면 … 간하여 막으려던 것뿐입니다. 비록 평상시에 있어서도 오히려 가두심은 불가하온데, 하물며 즉위한 처음에리까. 국문하지 마소서."

또 다음과 같은 '광'자 해석도 나오는데 자못 그 뜻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광(狂)이란 것은 그 뜻이 크고 큰소리하는 것이라, 말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고 행위가 생각에 맞지 아니하나, 성인이 허여한 것은 대개 뜻이 커서 장차 진취하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저 유자(儒者)는… 임금을 사랑할 줄 알되, 세상에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하니, 그 뜻을 힘씀이 유속(流俗)과 같지 아니하고, 그 말을 높게 함이 흔히 시의에 어긋나므로 바로 공자가 이른바 광이란 것인데, 적절히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광이란 것이 충직의 기본이며, 준열한 말은 제 몸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장차 국가에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에 새 정부가 서서 독단과 감시가 사라지고 새 기운이 세상에 번짐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되, '연산군 일기'로 인하여, 뜬금없이, 과거 정부가 어찌하여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는지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들의 말, 이언(邇言), 즉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말, 그리고 책줄이나 읽었다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말하는 쓸데없고 부질없는 말들 속에도 진실이 있고 정부와 시대, 세상에 대한 판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 정부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유념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