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시대 산봉우리나 높은 곳 굴뚝 설치
적 출몰때 '두 개'등 봉홧불 개수로 상황 전해
날씨 따라 관측 안돼 중앙까지 도달 못하기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군사용 통신 제도를 소개합니다. 지금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소식을 전하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사람이 직접 소식을 전하든가, 비둘기 같은 훈련된 동물을 이용해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특히 사람이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가 소식이나 문서를 전하는 제도를 '파발(擺撥)'이라고 하고, 파발 일을 하는 사람은 파발꾼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파발은 아무래도 사람이 직접 움직이다보니 며칠씩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나 생깁니다.
한편 더 오래전부터 더 빠른 군사용 통신 수단이 있었는데 그 방법은 연기와 불꽃을 통해 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봉수제(烽燧制)라고 부르는 이 제도는 '봉(烽)'은 불꽃을 말하고 '수(燧)'는 연기를 뜻합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 소식을 전하던 제도입니다.
미리 약속을 정해서 봉홧불의 개수로 변방의 군사적인 위급을 중앙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다섯 개의 커다란 굴뚝을 중심으로 운영됐습니다.
평상시에는 한 개, 적이 국경 밖에 출몰하면 두 개, 방어선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넘어오면 네 개, 마지막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개의 봉수를 올려 신속하게 근처의 군영과 중앙에 현장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봉수대는 높은 곳에 설치합니다. 그리고 봉수대 사이가 서로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 도착점은 서울 목멱산, 지금의 남산입니다. 지금도 남산 꼭대기에는 봉수대에 5개의 봉화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전국에는 5개의 봉수 노선이 있었는데, 제1로는 함경도 경흥에서 출발해 강원과 경기도를 거쳐 오고, 제2로는 경상도 동래에서 경북, 충북, 경기도를 거쳐 오고, 제3로는 평안도 압록강가에서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를 거치는 노선입니다.
제4로는 평안도 의주에서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노선이고, 제5로는 전남 순천을 출발해 전라도 해안을 거쳐 충남, 경기도 및 강화도를 거쳐 중앙으로 연결되는 노선입니다.
봉화대는 전국에 약 610개 정도 있었습니다. 제주도에도 해안을 따라 63개의 봉화를 피울 수 있는 시설이 있었는데 이것을 연대(煙臺)라고 하지요. 제주도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는 이 봉화대 흔적이 꽤 남아 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봉수제도가 당시에는 그렇게 효용적이지 못했다고 하네요.
실제 변방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봉홧불이 서울 남산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날씨에 따라 관측이 안 되어 중간에 봉화가 끊어지거나 하루 24시간 관측하는 봉군(烽軍)이 근무를 게을리할 경우 변방의 위급한 소식은 중앙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큰 전쟁 때 대부분이 남산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말았답니다. 물론 나중에 관련자들은 무거운 처벌을 받았겠지요.
그래서 봉군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고 신분은 양인인데 역할은 천민이라고 기피해서 자식에게까지 봉군의 일을 세습시키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특히 겨울에 높은 산봉우리에서 근무해야하는 봉수꾼들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수원 화성에도 봉홧불을 올리던 봉돈이 있어요. 안산 흥천대의 봉수대와 용인 석성산의 봉수대를 연결하던 화성 봉돈은 지금도 시설이 완벽하게 복원돼서, 다른 지역의 산꼭대기에 있는 봉화대와는 다르게 봉홧불을 올리던 흔적을 가까이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김찬수 동원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