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발전이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 점점 촉진할것
그때는 생명과 교감하는
농사야 말로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리를 따지 못하면 '손해'라서 이 장마비가 괴로운 것이 아니다. 이익과 손실로 사물과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투자자의 관점이요 상인의 자세다. 농부들의 심성은 그에 매여 있지 않다. 물론 농부의 경제에도 손익계산서는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생명을 지키지 못하여 괴로운 것이다. 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열매를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하나라도 살려보려 애쓰는 것은 그걸 잃어버리는 것이 하늘에 짓는 죄 같아서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들은 '손해가 크겠다'는 소리가 달갑지 않았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보다 무엇이든 쉽게 화폐적 가치로 환산하는 사유방식이 먼저인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가뭄에는 물을 대주고, 큰 비가 오면 물을 빼주고, 눈이 오면 어린 가지의 눈을 털어주며 동고동락해온 나무들이다. 내가 나무를 키우기도 하지만 나무도 나를 농부로 키워준 시간. 그 시간성의 관계가 어떻게 손익의 대차대조표로 정리될 수가 있겠는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뺄셈과 덧셈이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고 깊어져가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교육도 농사와 같은 일이다. 그것은 상품 생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 일이고,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니 교육의 장은 시장이 아니라 텃밭과 같은 곳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상품에 대하여 생산자나 판매자는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오직 대상을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신뢰와 책임과 그와 내가 맺는 관계의 성격을 고민한다. 내가 나무를 삶의 동반자라 여길 때, 나무도 나를 믿고 의지한다. 우리는 서로 배운다. 나무는 사람을 배우고 사람은 나무를 배운다. 배움은 무엇보다도 관계다.
오늘날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 관계성의 상실이다. 인격적 관계가 화폐 관계, 상품 관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교육이 서비스 산업이 되면 학교 구성원들은 생산성을 위해 복무하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효율성과 생산성이 교육의 철학이 될 수 있는가. 교육은 교과과정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 교사, 친구, 노동자 등 학교를 통해 맺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과 삶을 배운다. 경쟁이 극심해지고 고립될수록 우리는 관계를 갈망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교육 혁신안으로 나오는 고교학점제와 무학년제와 같은 발상은 우려스럽다. 공동체적 관계의 회복과 재구성이 아니라 배움의 단위를 아예 개인으로 완전히 파편화하기 때문이다. 국가주의 획일주의 교육을 타파하고 교육적 다양성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 '선택권'이라는 것은 교육의 철학이 아니라 시장적 가치다. 대학에서는 학점당 등록금제와 다전공제, 선택학기제 등이 대학 혁신 과제로 예고되어 있다. 모두 '수요자 중심 교육'이란 말로 쉽게 정당화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교육철학이 부재할 때 수요자 중심은 소비자주의의 다른 말일 뿐이며 선택의 다양성은 곧 상품 선택의 다양성을 뜻할 뿐이다. 교육이 상품 생산 과정이 되면 학교는 더 큰 수요자의 이해에 봉사한다. 그 수요자는 시장이다. 시장의 투자자들은 학교가 기업이 되기를 원한다. 인간상품, 인간자원을 생산하는 교육산업의 확장과 발전을 원한다. 그런데도 미래교육이란 이름으로 교육을 미래 시장과 미래 산업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너무 심각하다. 그러나 생명의 존재를 사물화 하는 과정이 교육일 수는 없다. '4차산업혁명'이란 섣부른 예언에는 회의적이지만 나는 기술 발전이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를 점점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는 끊임없이 생명과 교감하는 농사야말로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이 될지도 모른다.
/채효정 정치학자·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