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북문
문수산성 북문. /부흥고 제공

병자호란 거친후 방어체제 강화·축성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과 전투로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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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있던 1866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보려 합니다. 그 해는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해 소동을 일으킨 병인양요가 발생했던 때였지요. 김포시에서 염하(강화해협)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강화대교를 건너야 합니다.

오늘은 강화대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에 위치한 문수산성을 돌아보려 합니다. 문수산성은 염하를 지나는 배들과 강화도를 드나드는 사람들, 그리고 서울로 이어진 물길을 감시하듯 내려다볼 수 있는 문수산 자락에 지어진 산성이지요.

문수산성은 염하 건너의 강화 갑곶진 소속의 돈대들과 함께 염하와 조강 일대를 지켜 온 산성으로써 조선 숙종 20년(1694)에 둘레 2.4㎞의 규모로 건축됐답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효종을 거쳐 숙종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동안 구축해 온 강화도 주변의 해안방어 체제를 한층 더 강화하는 축성이었지요. <숙종실록>을 들춰보면 숙종 재위 초기부터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문수산성 축성에 대한 신하들의 건의와 논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또 통진의 문수산은 강도(강화도)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병자년에 적이 문수산에 쳐들어와서 장선을 끌고 내려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기에 전쟁에 졌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성을 문수산에 쌓아서 웅거하여 지킨다면 적이 오고 가는 것을 피리를 불고, 기를 휘둘러 통지할 수가 있습니다.』

순조 12년(1812)에 고쳐 쌓은 문수산성은 약 6km에 이르렀는데 현재는 약 4km의 성곽만 남아있고 복원된 남문, 북문, 그리고 산 정상의 장대 등이 옛 모습을 갖추고 있답니다.

아직 복원되지 못한 서문은 파괴된 성곽에 이어져 있었을 것인데 전문가들은 북문과 남문의 중간 지점인 갑곶나루 근처의 염하에 접한 평지에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문수산성은 왜 파괴됐던 것일까요? 바로 병인양요 당시 이곳에서 일어났던 프랑스군과의 전투 때문이었답니다.

병인양요 발생 직전인 그 해 봄,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 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병인박해가 일어났답니다. 이를 이유로 그 해 8월,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까지 들어와 정찰을 하고서 되돌아갔지요.

그 후 조선 정부가 강화도의 해안 경계를 더 강화했지만 증강된 함대로 9월 8일에 다시 침입한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점령했답니다. 열흘이 지난 9월 18일에는 조선군이 방어하고 있던 염하 건너편의 문수산성을 공격해왔지요. 그 때 문수산성을 지키고 있던 초관 한성근의 부대가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답니다.

병인양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지요. 그 전투에서 한성근의 부대는 프랑스군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지만 무기와 병력에 밀려 결국 후퇴하고 말았답니다.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도 오래 성내에 머무르지 않고 남문의 문루와 그 주변의 가옥들을 불사른 후 강화도로 철수했답니다. 그렇게 전투를 치르는 동안 해안 쪽의 성곽과 서문이 파괴되었던 것이지요.

문수산성 성곽을 따라 문수산을 오르다보면 강화대교 옆으로 갑곶나루 선착장이 멀리 눈에 들어옵니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피해 항전을 다짐하며 강화도로 피난했던 고종,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침략에 몸을 피했던 인조, 병자호란 때 피난했다가 청군에게 잡혀 나오던 봉림대군이 건넜던 나루였지요.

또 정상이 가까워지면 임진강과 한강이 하나의 물줄기로 만나는 조강 뒤로 북한 개풍군 땅도 눈에 들어와 분단의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병자년의 아픔, 즉 병자호란의 패배를 다시 겪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축성됐던 산성, 그 문수산성에서는 역사 속 여러 아픈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동시에 그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함께 문수산성을 처음 축성하고자 했던 선조들이 주는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김효중 부흥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