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철 수출하다가 흥한방직 설립
신신百 개점 이어 화신百 재개장
5·16때 박흥식 수감 3번째 시련
군사정권 수입대체 산업에 도전
1953년 2월 11일에는 인천시 학익동 430에 자본금 5천만 환(원)의 흥한방직(주)를 설립했다. 이곳은 원래 일제 때 제국제마(帝國製麻)주식회사 인천공장으로 방적기 1만추(錘), 직포기 200대 규모였다. 이 공장은 해방을 계기로 이종현(李宗鉉)이 경영했으나 6.25전쟁으로 부진을 겪다 화신에 인수된 것이다.
박흥식은 이를 흥한방직으로 재발족하고 이종현에게 경영을 맡겼다. 이종현은 박흥식과 동년배의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농림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년여의 복구작업을 거쳐 1954년부터 생산을 개시해 당기순이익 500여만환을 기록했으며, 1955년에는 면방기 1천368추, 직기 220대에 종업원 수가 500여 명에 달했다. 이 회사는 1974년에 화신산업에 합병됐다.
화신산업은 화신백화점 복구를 뒤로 미루고 1955년 11월 15일 서울 종로1가 49의 구 동화백화점 자리에 대지 1천678평, 건평 1천463평의 2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신축해서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면적이 넓은 1층은 연쇄점으로, 2층은 백화점으로 꾸며 임대전용으로 했다. 화신백화점은 1956년 10월 15일에 재개장하면서 과거와 같은 직영제가 아닌 임대제로 전환했다.
박흥식은 자유당정부와의 관계개선에 힘을 기울여 1955년 11월 26일에는 신축한 신신백화점에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하는 등 정치적 기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박흥식은 친일기업인으로 각인됐지만 이승만과는 같은 이북출신이어서 관계 설정이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새로 탄생한 민주당정부에도 접근했다. 박흥식은 장면정권이 들어선 후 몇 달 동안은 정부의 경제문제에 관한 자문에 응할 정도로 밀착했다. 당시 한 언론은 '정치는 장 총리가 하고, 경제 문제는 박모가 좌우하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화신은 해방 이래 3번째 시련에 직면했다. 쿠데타 1주 후인 5월 23일에 박흥식이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박흥식이 장면 총리체제하에서 막대한 이권과 융자를 받는 대가로 민주당정부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을 것이란 루머 때문이었다.
박흥식은 43일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다수의 부정축재 혐의 기업인들과 경제개발사업에 참여했다.
군사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인견사 10만t 규모의 2개 공장과 아세테이트 10t 규모의 1개 공장 건설사업을 국영사업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곧 방침을 바꿔 민영화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희망업체를 공모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인견사 수요가 증가했으나, 국내에는 생산시설이 전무해 연간 500만 달러 가량의 인견사를 수입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인견사를 국내에서 직접 제조함으로써 외화절약은 물론 일자리 확대에도 순기능을 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정부는 사업에 필요한 외자 2천만 달러의 차관을 지불보증해 주고 내자 84억 환의 절반을 융자해 주는 조건으로 희망업체를 공모했다. 총 10개 업체가 신청했는데 그 중에서 화신산업과 조선견직(朝鮮絹織)이 적격업체로 선정됐다. 정부는 화신산업과 조선견직에 각각 10t 규모의 공장을 1개씩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생산능력을 20만t 규모로 확대하면 건설비에서 30%, 생산비에서 10%씩 절감이 가능하다며 박흥식의 주도로 화신과 조선견직이 합자회사를 설립해서 공장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조선견직은 합작조건 등의 문제를 들어 참여를 포기함으로써 정부가 공사비의 1/2을 융자해준다는 조건으로 화신산업이 단독으로 추진하게 됐다.
일제시대에는 주로 백화점과 연쇄점업을 근간으로 해서 성장해온 화신이 8.15해방 후에는 무역업으로 기반을 다지다가 또다시 수입대체산업에 도전한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