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 포위속 역습 감행 적 퇴각시켜
지역민 사당 세워 매년 음력9월 제향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몽골이 주변 지역을 차례로 침공했으며, 고려에 많은 공물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가령 고종 8년(1221)의 경우 수달피 1만 장, 고급 비단 3천 필, 종이 10만 장을 포함해 고려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품을 요구했다.
저고여가 피살되고 7년이 지난 고종 18년 몽골의 침략이 시작됐다. 몽골은 저고여의 피살을 침략의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실상은 징기스칸 사망(1227년) 후 황위를 계승한 태종 오고타이칸의 동아시아 정복전쟁 정책이 연장선이었다.
몽골의 고려 침략은 6차례에 걸쳐 이어졌고, 집권세력인 최씨 무신 정권은 1차 침략 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백성들을 산성이나 섬으로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정면 대응하기에는 고려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현실적인 측면도 감안된 방식이었다.
강화도 천도 후 2차 침략이 있었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이가 전사하자 퇴각했다. 살리타이의 전사로 퇴각한 이듬해 몽골은 금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그 다음 해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몽골은 고려에 대한 3차 침략을 계획했다. 3차 침략은 고종 22년(1235)부터 26년(1239)에 이르기까지 5년에 걸쳐 계속됐다.
고려 정부는 3차 침략 시기인 고종 23년(1236)에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을 몽골군이 지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파견했다. 방호별감은 산성으로 피난한 백성들을 통제하면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현재의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죽주산성에는 송문주 장군이 방호별감으로 파견됐다.
죽주산성은 경상도, 충청도로 이어지는 주요 길목일 뿐만 아니라 한강과 서해안으로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가 되므로 몽골군이 반드시 지날 수밖에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죽주에 도달한 것은 송문주가 죽주에 파견된 직후인 고종 23년 8월 말 경이었다. 몽골군이 처음으로 죽주산성에 이르러서는 먼저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자 성 안의 병사들이 출동해 이들을 쫓았다. 그러자 사방을 포위하고 포(砲)를 쏘며 성과 문을 무너뜨리려 했다.
사방의 성문이 떨어지고 부서졌으나, 성중에서도 포(砲)로써 역습해 몽골 군사가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몽골 병이 또 사람의 기름을 짚에 붓고 불을 붙여서 공격했다. 성중의 군사들이 일시에 성문을 열고 돌격하니 몽골 병의 죽은 자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골 병이 갖은 방법을 다해 공격한 지 15일간이나 지났으나 결국 함락하지 못하고 성을 공격하던 기구들을 소각하고 퇴각했다. 송문주는 몽골의 1차 침입 때 치러진 귀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몽골군은 1231년 9월부터 12월까지 4차례에 걸쳐 귀주성을 끈질기게 공격했으나, 죽주 출신인 박서 장군은 군민(군민(軍民))들을 지휘해 치열하게 싸운 끝에 몽골군을 물리쳤다. 송문주는 귀주에 있을 때부터 몽골군이 성(城)을 공격하는 전술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적의 계획을 예측 못하는 것이 없었다.
죽주산성 내에는 송문주 장군 사당이 세워졌다. 조선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이 지은 '송장군묘비명'에는 사당이 5~600년 전에 세워졌다고 했다. 그의 사후부터 지역민들이 감사하는 그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 지역 사람들이 '송장군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있다.'면서 '모든 죽주 사람들이 송장군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송문주 장군의 생몰년대는 전해지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9월 9일에 면민들이 합심해 제향을 올리며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
/장연환 효명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