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무죄 선고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 '친일 흔적' 반려
연구자들 "일제 강점기 신문기사 왜곡 가능성" 근거 부족 우세
독립운동가이자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바지한 공로를 국가 차원에서 하루빨리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 2011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간첩 누명을 벗은 지 6년이 지났고, 31일 열린 추모식에서 '사법 살인'을 당한 지 58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예우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조봉암 선생에 대한 국가의 '서훈 문제'는 여전히 진전이 없다.
대법원이 2011년 1월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조봉암 선생의 주요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직후, 유족은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다.
국가보훈처는 일본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1941년 12월 23일자 기사를 근거로 죽산에게 친일 흔적이 있다며 유족이 낸 신청을 반려했다. 유족은 2015년에도 재심을 신청했지만, 같은 이유로 국가보훈처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에는 '인천부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 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150원을 인천서를 통하여 수속하였고'라며 조봉암이라는 사람이 일본군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조봉암 연구자들 사이에선 매일신보 기사가 친일의 근거로 부족하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여러 정황상 사실 관계 자체가 왜곡됐거나 조봉암이 직접 낸 게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당시 조봉암의 주소는 서경정(지금의 중구 내동)이 아니라 소화정(지금의 부평구 부평동)이었다는 사실은 일본의 관헌 자료에도 나와 있다.
죽산 조봉암은 1945년 1월 일본군에 체포돼 해방 당일까지도 용산헌병대 감방에 갇혀있기도 했다. 조봉암 선생은 용산헌병대에서 풀려나자마자 건국운동에 동참했다.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봉암 평전'(2013)을 쓴 이원규 작가는 "일본군 위로금은 죽산의 후원자들이 대신 내준 것이거나 죽산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경찰의 공작으로 봐야 한다"며 "해방 직후 공산주의 진영인 박헌영(1900~1955)이 죽산을 명렬히 비판할 때도, 사실이라면 가장 약점일 수 있는 친일 문제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조차도 죽산 조봉암 선생의 친일 흔적과 관련해 명확하게 입장을 정리하진 않았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친일 관련으로 서훈이 보류된 것은 맞지만, 사안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판단"이라며 "독립유공자 서훈은 꼭 유족이 신청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가 죽산 조봉암 선생의 서훈을 재검토할 가능성이 기대되는 이유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죽산 조봉암 선생 '사법 살인' 58년만에 첫 정부 공식예우] 국가서훈 6년째 제자리"속히 인정해야" 목소리 커진다
입력 2017-07-31 22:24
수정 2017-07-3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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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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