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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에서 저항은 비극성 본질
비가(悲歌)로 나타나기 때문에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개인주의 어법·사적 감성 편향을
미학적 반성과 공공적 기억으로
저항의 전통으로 새겨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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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일흔두 번째 맞는 광복절이다. 오늘 우리는 오랜 식민지 시대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빛[光]의 회복[復]'을 희구하며 당대를 견뎌왔던 수많은 이들의 각오와 헌신과 희생을 기억한다. 그 시절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무분별한 관용과 망각의 어법은, 당대의 정치권력과 날카롭게 대립했던 저항의 실제 목록들 앞에서 속절없이 무색해진다. 이때 저항이란, 자신의 정체성이나 가치를 침탈하려는 외부의 억압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는 태도 및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태도나 가치가 분명한 이들일수록 그릇된 폭력에 대한 저항은 불가피하고 또 지속적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저항'이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유형무형의 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값을 증명하는 일련의 태도와 행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형성된 권력에 대하여 일종의 정당방위적 면모를 띠게 된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는 일제의 엄혹한 신질서 상황에서 비판적 사유의 대상인 타자를 자기 자신으로 선택한 보기 드문 저항적 실례에 속한다. 그의 시 속에 숨쉬고 있는 성정은 자신의 실존적, 역사적 존엄을 해치는 부당한 힘에 대한 저항과 그 곤혹스런 시대와 맞서 있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성찰로 빛을 발한다. 우리는 윤동주를 통해, 소리 높은 외적 비판보다 자신을 응시할 줄 아는 타자성의 실천이 얼마나 가치 있는 저항인가를 지금 경험하고 있다. 그러한 속성이 모두 그를 불멸의 저항으로 기억하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에게 후회는 있지만 반성은 없고, 비판은 잦지만 정작 반성의 대상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태도가 부족하다고 할 때, 우리는 저항의 속성 가운데 자기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성찰의 몫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절감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 이성의 극점으로서의 저항에 대한 신뢰와 경의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이러한 속성은 외부적 저항의 강렬함과는 대비되는 성찰적 저항의 표지(標識)로 오랫동안 우리 기억 속에 굳건히 자리를 지켜갈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당대의 혁명가였던 이육사의 저항은 윤동주와 달리 외부적인 것을 직접 향하기도 했다. 이육사의 저항성을 키운 건 일제의 폭력성이었고, 또 그러한 간난신고의 삶의 현장이 오히려 혼을 울리는 명편을 길어 올리는 토양이 되었다. 그가 체포되어 압송되었다가 순국한 북경시 내구 동창호동(東廠胡同) 1호 건물은 일본군 헌병대 북경본부 부속 형무소가 있던 곳이다.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북경의 명소 왕부정(王府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지난 8월초에 찾은 이곳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그야말로 흉가와도 같아 보였다. 소소한 안내판 하나 없어 건물의 의미를 전혀 알 길이 없다. 1925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생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이육사는 광복을 앞둔 1944년 마흔하나의 나이로 이곳에서 옥사했다. 이 건물에는 사람들이 몇몇 살고 있었는데, 일정한 보존 조치가 수반되지 않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할 정도로 낙후한 상태였다. 이육사 저항의 최후 거처였던 이곳이 외교부나 문광부의 노력으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물론 서정시에서 저항은 복고적 회귀를 열망하는 것으로는 성취되기 어렵다. 자기 성찰을 동반한 대안적 사유를 기반으로 할 때, 그것은 소망 충족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항의 형상은 비극성을 본질로 하는 비가(悲歌)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최근 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개인주의적 어법이라든지 사적(私的) 감성으로의 편향을 미학적으로 반성하면서, 공공적 기억으로서의 저항의 전통을 새겨가야 한다. 그동안 어렵게 쌓아올린 보편적 가치들이 이완되어가고, 또 중국이나 일본 등 이웃나라들의 그릇된 역사 왜곡에 의해 그것들이 근본에서부터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러한 저항성의 흐름을 기억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값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어둑하고 한편으로 쉼 없이 빛을 되쏘는 광복절이 아닌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