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전인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 첫 라디오 방송 송출
해방후 '서울중앙방송'으로 변경
1947년 9월 3일 ITU로 부터
HL이란 독자 호출부호 처음 받아
사실상 자주적 방송시작 계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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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 한신대 교수
어제는 대한민국이 광복 72주년을 맞은 뜻깊은 날이었다. 72년 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의 "나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전했다"라는 항복 방송을 접하며, 우리 민족은 비로소 광복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1920년에 창간된 양대 신문인 동아와 조선은 1940년 8월 11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상태였기에 안타깝게도 지면을 통해 해방의 소식을 접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방송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90년 전인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에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JODK"로 시작하는 첫 라디오 방송이 송출되었다.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미국 피츠버그 KDKA가 출범한 지 7년, 일본 도쿄에서 라디오 방송국이 개국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JODK'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일본에 할당한 호출부호(콜사인) 'JO'에 도쿄(AK)·오사카(BK)·나고야(CK)에 이은 4번째 방송국이라는 뜻의 'DK'를 결합한 것이었다. 경성방송국은 초기에 일본어와 조선어를 7대 3의 비율로 방송하다가 조선인의 불만이 커지자 같은 해 7월부터 일본어와 조선어의 비율을 6대 4로 조정했고, 1933년 4월부터 연희송신소를 세워, 900㎑의 경성 제1방송(일본어)과 610㎑의 경성 제2방송(조선어)으로 나눠 운영했다.

방송이 시작되자 신문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뉴 미디어인 라디오에 대해 관심이 쏠렸지만, 정작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에 쌀 한 가마니 값이 5원 정도였는데 월 청취료가 2원이고, 수신기 가격은 보통 40∼100원대였다고 하니 서민들은 엄두도 내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라디오를 들으려면 경성방송국과 계약을 맺어야 했고, 수신 계약자는 청취허가장을 대문 밖에 붙여야만 했다. 개국 당시 청취자는 조선인 275명을 포함해 1천440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어 전용 방송이 생겨난 1933년에는 2만5천여 명으로 불어나 당국이 불법 청취자 단속에 고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5년부터는 경성방송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같은 해 부산방송국의 개국을 필두로 청진·평양(1936년), 이리(1937년), 함흥(1938년) 등 지방에 방송국이 잇달아 설치된데 따른 것이었다. 일제 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경성방송은 식민지 경영이 목적이었고 비상시에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전략적 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된 방송인 JODK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최초로 알리게 된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여기서 방송 호출부호에 대해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ITU가 세계 각국별로 무선국, 방송국을 식별하기 위해 제공하는 중복되지 않는 일련의 문자열이 바로 호출부호인데 콜사인(call sign)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 체제에서 '경성방송'이 '서울중앙방송'으로 바뀐 상태에서도 일본의 호출부호인 JODK를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호출부호로만 보면 아직 해방이 되지 않은 식민 상태였던 것이다.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는 2년여 동안 이 호출부호를 계속 사용하다가 1947년 9월 3일, ITU로부터 처음으로 HL이라는 독자적인 호출부호를 부여받게 된다. 사실상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고, 이를 통해 방송에 관한 독립적인 주권을 갖게 된 셈이다. 그래서 이 해를 기점으로 하여, 올해를 우리 방송 70주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찌 되었든 방송계는 이날을 기념해 9월 3일을 방송의 날로 지정한 바 있다.

ITU의 호출부호 할당으로 인해 사실상 우리나라가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방송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방송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그 의미를 기억하고 공공재인 방송 전파를 올바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문철수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