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을 앞둔 지난 14일 한 갤러리에서 명성황후(1851∼1895)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는 초상화를 공개했다.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이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양식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인데, 족자 뒷면에는 '부인초상(婦人肖像)'이라는 글자가 세로로 적혀 있다. 해당 갤러리 측은 적외선 촬영 결과 부인이라는 글자 위에 '민씨(閔氏)'라는 글씨가 있었으며, 여성이 착용한 신발이 고급 가죽신인 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독립정신'에 등장하는 명성황후 추정 사진과 용모·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맞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한복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거나 "옷차림이나 용모를 보면 왕비의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며 명성황후로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명성황후의 제대로 된 얼굴을 알지 못한다.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으로 왕의 얼굴이 담긴 어진(御眞)만 그렸을 뿐 왕비에 대한 초상화를 남기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1890년대부터 조선 왕실 인물들의 사진이 신문과 잡지, 엽서 등에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려다 시해 당한 왕비, 혹은 시아버지와 대립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한 여걸로 각인된 명성황후의 생전 모습을 상당히 보고 싶어 했다.
대중들의 끊임없는 '명성황후 사진' 요구에 그의 사진이라고 유통됐던 것은 총 3점인데, 첫째는 평복 차림의 젊은 여인, 둘째는 원삼(예복)을 입고 어여머리(상류층 부인들이 예장용으로 하던 머리모양)에 떠구지(떠받치는 비녀)를 한 여인, 셋째는 모시옷에 부채를 들고 찌푸린 얼굴로 앉아 있는 여인이다. 이 사진들은 1890~1900년 사이 여러 외국의 잡지와 저서, 사진첩들에 서로 다른 제목들이 붙여진 채 유포됐다. 하지만 이 사진들 모두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으로 공인되지 못했다. 학자들은 흥선대원군 추종 세력에 의해 명성황후의 친척들이 암살당하면서 그의 대인기피증, 암살 공포증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일부러 초상화를 남기거나 사진을 찍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아무튼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명성황후 얼굴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될 전망이다.
/김선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