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외교권 강탈' 늑약 끝까지 맞서
끌려나와 감금돼… 묘 고양 향토문화재 지정
'경술국치'라고 불리는 1910년의 국권 강탈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일제의 손에 넘어 간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답니다. 1905년에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국권침탈 과정과 관계있는 유적지를 찾아 나서려 합니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옛 통감 관저 터는 모두 서울 시내에 있는데 관련된 유적지가 경기지역에 있을까요?
비록 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아니지만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의 야트막한 산자락에는 체결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답니다. 일본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을사늑약 체결에 끝까지 반대했다고 알려진 인물인 한규설의 묘가 바로 그 곳입니다. 고양시 지정 향토문화재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지요.
1904년에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의정서(1904.02.23.)와 제1차 한일협약(1904.8.22.)을 체결해 대한제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이듬해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와 각각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27.), 제2차 영일동맹(1905. 8.12.), 포츠머스 조약(1905.9.5.)을 체결해 대한제국에서의 일본의 영향력 행사에 대한 승인까지 받아냈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일제는 그 해 11월에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파견, 을사늑약 체결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고종 황제의 완강한 거부로 조약 체결 진행이 여의치 않자 11월 17일 저녁에는 자신들의 군대를 동원한 가운데 대신들을 덕수궁 중명전으로 불러들였답니다.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기 위함이었지요. 이토 히로부미 외에 협상에 참여한 사람은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었답니다.
밤늦도록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협상 직전의 어전 회의에서도 체결 반대를 결의했던 대신들이 하나 둘씩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답니다.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 와중에 이 묘의 주인인 한규설을 비롯한 민영기, 이하영 등 세 명의 대신들이 체결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답니다.
한규설은 끌려나와 마루방에 감금되기까지 했지요. 이후 협상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결국 새벽 2시께, 고종 황제의 전권 위임장도 받지 않았던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문에 인장을 찍고 말았답니다. 강제로 '늑약'이 체결된 것이지요.
<제2조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을 중개로 하여 경유하지 않으면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의 체결이나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제3조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아래 1명의 통감을 두고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게 한다.>
일제는 이 늑약문을 근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내정을 간섭했습니다. 하지만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는 조약이었답니다. 조약 이름도 명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 황제의 비준 절차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 그리고 경찰권과 사법권의 박탈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대한제국을 점점 더 무력하게 만들었답니다.
경술 국치일을 앞둔 8월의 끝자락, 한규설의 묘를 돌아보며 을사 늑약 체결에 맞섰던 인물들의 기개와 국권 강탈 사건을 치욕으로 여겨 울분을 토했던 선조들의 심정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김효중 부흥고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