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읽어도 가슴 따스해지는
정지용의 아름다운 시 '향수'
얼룩백이 황소 울음 듣는 삶
이젠 그런 삶 가능하지 않아
북한의 핵·미사일 이고 살기에
평화는 힘의 균형에서만 가능
정지용 생가의 앞마당에 서면 담장 밑으로 여름꽃들이 환하게 방문객들을 맞는다. 크지 않은 감나무는 시인과는 무관하게 후에 심어진 듯 하다. 감잎이 여름 햇살을 받아 차르르 빛난다. 마당 끝으로 넓은 벌을 휘돌아나가던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지금은 개천을 정비해서 돌로 수로를 쌓았다. 실개천의 정취는 사라지고 없다. 넓은 벌이었던 들판에는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정지용(1902~1950?)은 1902년 5월 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에서 정태국과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2세 때 동갑인 송재숙과 조혼을 했다.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22세에 교비생으로 일본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진학한다. 졸업하고 귀국하면 휘문학교의 교사로 일한다는 조건이었다.
졸업 후 휘문학교 영어교사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경향신문사 주간 등을 역임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 서울이 점령되자 정치보위부로 잡혀가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 후 폭사 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죽음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문학적 양심은 북한에서 더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에 발간된 잡지 '문장'지의 시 부문 추천위원을 맡게 되면서 역량 있는 시인들을 문단에 내보냈다. 그의 추천으로 등단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은 해방 후 한국 시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월북 시인으로 알려져 그의 시집은 오랫동안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다. 모윤숙, 김동리, 박두진 등 많은 문인들이 그의 해금을 탄원하며 정지용 문학의 회복 운동을 벌여왔다. 마침내 결실을 얻어 1988년 3월 31일, 그의 문학이 해금되었다.
노래로 널리 불려진 '향수'가 정지용의 대표작으로 알려졌지만 주옥같은 시편들이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그중 '유리창'은 세상을 떠난 자식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시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를 읽노라면 아비의 슬픔이 어둠처럼 왈칵 밀려온다.
'카페 프란스'에서는 나라 잃은 슬픔과 서러움을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비뚜루 선 장명등/카페 프란스에 가자//이 놈은 루바슈카/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삐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틴 밑에서 조시는구료!//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오오, 이국종 강아지야/내발을 빨아다오/내발을 빨아다오'라고 노래한다.
'향수'는 언제 읽어도 가슴 따스해지는 아름다운 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읊조리노라면 정지용의 고향마을이 선연해진다.
얼룩백이 황소의 금빛 게으른 울음을 듣는 목가적인 삶, 이제는 그런 삶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오늘의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힘의 대등한 균형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