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 사용됐던 임금의 도장은 외교문서나 행정에 쓰였던 '국새(國璽)'와 의례용인 '어보(御寶)'로 구분된다. 임금의 집무용·대외적으로 사용되는 도장인 국새와 달리, 어보는 왕실의 혼례나 책봉 등 궁중의식에서 시호·존호·휘호를 올릴 때 제작돼 일종의 상징물로 보관하던 것이다. 왕과 왕비뿐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도 어보를 받았고, 왕과 왕비의 어보는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안치됐다.
미국으로 불법 반출됐다가 지난 7월 대통령 전용기편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온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가 최근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됐다. 그런데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 공개되던 당일, 문종·현종 어보와 함께 선을 보인 덕종 어보 1점과 예종 어보 3점이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소위 '짝퉁 어보' 논란이 불거졌다.
어보의 진위 논란에 문화재청은 "1471년,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던 덕종 어보와 예종 어보 등 4점이 일제강점기인 1924년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 어보들은 종묘에서 도난돼 당시 조선왕실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인 이왕직(李王職)이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제작을 지시, 다시 만들어진 후 종묘에 안치됐으며 원품은 아니지만 모조품도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가짜는 아니다'라는 논리다.
더 큰 문제는 문화재청이 일제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어보들이 원품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오는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심사에 등재 신청을 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실 어보 331점과 왕이 직위를 하사할 때 내리는 교서인 어책(御冊) 338점을 묶어서 신청한 것인데, 우리나라 문화기관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게 생겼다. 더구나 '종묘일기'를 보면 1924년 5월 6일 짝퉁 어보를 종묘에 봉안을 한 자가 친일파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라는 기록까지 나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립고궁박물관은 최근까지 덕종어보 모조품이 '1471년 제작된 조선왕실 어보'라며 홍보했고, 올 초 모조품임을 파악하고도 8개월 넘게 쉬쉬한 것으로 확인됐다. 세계유산 등재는 차치하고라도 낯이 뜨거워 조상들 뵐 면목이 없다.
/김선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