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레 중심부에선 늘 겸손한 태도로 세상 본다
무지 앞에 있고 둘러싸임 아는게 배움의 자세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의 '크세주'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서양에서 에세이란 장르를 창시한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가져온 말이다. 몽테뉴는 이 말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의심하는 상태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담았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주장을 방법적 회의주의라고 부르는데, 지식을 탐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든 지식을, 특히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의심해 본다는 뜻이다. 한 개인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도 없거니와 어떤 사안이나 현상에 대해 일정한 지식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앎의 끝일 수 없다. 그 지식은 그의 지적 조건과 근면성과 주어진 자료에 따른 현재 상태의 지식일 뿐이니 모든 지식에 관한 담론은 그 탐구과정의 중간보고라고 말해야 옳다.
"철학이라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의술인 것이 다른 의술은 치료된 다음에만 즐겁지만 철학은 즐거움과 치료를 동시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말도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은 모든 교육이 가벼운 축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원용되기도 하지만, 모든 지식은 교리와 독단의 형식으로 전해질 것이 아니라 유동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뜻을 그 배후에 숨기고 있다. 의심하는 상태에서 그 의심을 깨치면서 앎을 넓히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즐거운 일도 드물다. 몽테뉴가 남긴 수많은 말 가운데 내가 이 두 문장을 같은 순간에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식 탐구에 대한 그의 회의주의에 내가 동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식에 대한 몽테뉴의 태도를 내 생활에서 다시금 긍정하게 되는 경험은 의술과, 아니 정확히 더 말해서 의사 선생들과 연결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생이던 때 어떤 의사가 쓴 칼럼 하나를 읽었다. 그는 유학 시절에 사귄 미국인 의사가 한국을 방문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 인삼을 선물로 주었다. 그 미국인 의사는 제 나라에 돌아가 인삼을 분석했더니 치료나 건강유지에 특별히 유효한 성분이 없다는 편지를 한국인 친구, 다시 말해서 그 칼럼의 필자에게 보내왔다. 한국인 의사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인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미신일 뿐이라고 칼럼에 적고 있었다. 홍역을 앓는 중에 피란을 가서 생사의 길을 헤매던 나는 인삼탕으로 건강을 회복한 경험이 있기에 그 의사의 칼럼을 신용하기 어려웠다. 그의 미국인 친구가 별 성의도 없이 인삼을 분석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 뒤로 인삼의 효능은 여러 실험과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
여러 경험 중에 한 가지 예만 더 들자. 황희 정승이 말년에 한 쪽 눈을 감고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하인에게 "눈을 번갈아서 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 안과의사가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두 눈의 초점을 맞춰 사물을 보는 '눈의 과학'을 말하며, 황희 이야기가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밤중에 책을 읽다가 두 눈을 번갈아 뜨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좌우의 시력이 다른 심한 짝눈이다. 눈이 피곤할 때는 초점을 맞추려 애쓰기보다 눈을 번갈아 뜨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뜨고 있는 눈은 힘이 들지만 감은 눈이 그 동안 쉬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한 지식체계의 변두리에서는 지식이 낡은 경험을 식민화하지만, 오히려 중심부에서는 지식이 늘 겸손한 태도로 세상을 본다. 제가 무지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