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에 위치한 장안문(長安門)은 수원 화성(華城)의 북문(北門)이자 정문이다. 장안(長安)은 원래 중국 당나라의 수도였기에 '또 다른 서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4대문'하면 서울의 숭례문(崇禮門)처럼 남문(화성에서는 팔달문에 해당)이 중시되게 마련이지만, 정조 임금이 수도인 한양에서 수원으로 행차할 때는 우선 장안문을 거쳐서 들어오기 때문에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장안문의 현판(편액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썼다는 주장이 제기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중앙일보 2015년 8월 14일 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에는 장안문이 있는데 화성을 복원할 당시 이병희 의원이 권유해 '장안문(長安門)' 현판을 내가 써서 걸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
지난 4월에 출간된 '수원야사(이창식·한동민 지음)'에 따르면 김 전 총리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장안문 현판은 영·정조시대의 문신인 조윤형이 썼다. 화성의 남·북문인 팔달문(八達門)과 장안문 현판을 그에게 쓰게 할 만큼 정조는 조윤형의 글씨를 무척 좋아했다. 참고로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은 유언호가 썼고, 서문인 화서문(華西門)은 채제공의 글씨다.
1975년 6월 7일 화성 복원공사 기공식이 개최됐고, 1단계 사업의 핵심은 장안문의 복원이었다. 당시 화성 복원을 담당하던 경기도청에서는 장안문 현판 글씨를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의뢰하기로 했다. 경기도지사가 국무총리의 서류 결재를 받는 날 글씨 부탁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대비해 화성 복원의 실무책임자였던 이낙천은 먹물과 종이까지 준비했는데 하필 그 전날 강화도로 출장을 가게 됐고, 폭설로 인해 제때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도지사만 서울에 올라가 김 총리의 결재만 받았고 글씨부탁은 하지 못한 채 내려오고 만다. 이후 국무총리를 대신해 조병규 경기도지사가 직접 장안문 현판을 쓰게 됐는데, 그가 썼던 글씨가 작고 필획에 문제가 있어 도청에서 근무하던 필경사(직업으로 글씨 쓰는 사람) 양근웅이 도지사의 글씨를 개작했다고 한다. 조병규와 양근웅의 합작품인 것이다.
/김선회 논설위원